<우리 집 위층엔 킹콩이 산다>라는 어린이 책이 있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층간소음 문제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풀어낸 책이다. 조금만 뛰어도 쏟아지는 어른들 꾸지람 때문에 속에서 들끓는 ‘킹콩’을 꾹꾹 눌러 잠재워야 하는 아이가, 위층에 사는 또 다른 ‘킹콩’을 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래윗집 사이에서조차 교류와 소통이 단절되고 이해와 배려를 키울 기회를 갖지 못해 벌어지는 갈등과 적대감을 아이들은 상상 속의 ‘킹콩클럽’을 결성하여 나름 슬기롭게 해결한다.

어느 시인은 10분 안에 층간소음을 영원히 없애는 비결을 소개한 적이 있다. 위층에서 발 구르는 소리가 심할 때 과자봉지나 아이스케이크를 사들고 윗집 벨을 누르는 것이다. “이 집에 개구쟁이 아이가 있나봐요? 어떤 녀석인지 이거라도 주려고요.” 그렇게 아이 얼굴을 확인하고 나면, 그날부터 신기하게도 층간소음이 싹 사라진단다. 소리가 들리면 ‘아, 요놈이 자지도 않고 또 뛰는구나. 개구쟁이 녀석…’ 한다는 것.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꼭 한 명씩 거지가 살았다. 동네 바깥 산비탈에 움막 정도는 파고 살았는데, 낮에는 이 집 저 집에서 얻은 찬밥에다 낡아서 버린 작업복 따위를 걸치고 양지바른 곳에서 졸면서 이럭저럭 지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당신 집을 두드리는 낯선 타자야말로 당신의 윤리적 책임을 명령하는 신의 얼굴”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어려운 표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거지에게 최소한의 것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예전에는 과부나 고아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동네를 뜨는 일이 생기면, 그 동네는 천하의 몹쓸 것들이 사는 동네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도 유명하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은 이 일화에서 연장하여 타자에 대한 ‘환대’의 문화를 설명한다. 초기 기독교 가정에는 아무리 빈한한 집이라도 늘 세 가지 보물이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양초, 담요, 마른 빵이 그것이다. 낯선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양초를 켜서 문턱을 넘게 하고, 마른 빵이나마 허기를 채우게 한 다음, 담요를 덮어 재웠다는 얘기다. 누가 이 하찮은 것들을 ‘보물’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또 이런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나를 포함해 대개의 사람들은 개인의 작은 행동이 거대 차원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걸 잘 상상하지 못한다. 나 하나의 관심과 행동이면 뭐하나, 남들은 여전할 텐데 하는 마음이다. 여기에는 생활의 반경과 관계의 범위가 너무 넓어진 탓도 크다. 내가 다 관여하거나 책임질 수 없으므로 방치하고 편승하는 식이다.

거지와 과부와 고아를 책임지지 못하는 동네는 사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든 동네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각을 바꿔 가령 한 동네에서 나온 쓰레기를 어떻게든 그 동네가 떠안는다고 해보자. 분뇨와 오물도 배출자가 처리하고, 모든 산업적 상품의 부산물도 생산 기업이 책임진다고 해보자.

우리의 윤리의식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은 거지와 고아와 삶의 부산물들을 은폐하는 사회적 논리 때문이다. 삶의 편의와 안녕을 누리는 데 반드시 수반되는 많은 것들이 은폐된다. 마트의 식육코너에 갈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 깔끔하게 포장된 저 고기들을 도축한 모양 그대로 팔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선홍색의 마블링만 보지 울부짖는 송아지의 피와 뼈와 체액은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 사이의 땀과 고통과 질병도 마치 불순한 이물질인 양 은폐한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감당하고 있을 고된 삶을 저만치 밀어두고 차단한다.

거대하고 글로벌화된 세계, 그래봐야 작은 인간으로서는 평생 삶에서 마주치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사느라 우리는 정작 나의 세계를 잊었다. 사실 그 세계는 수많은 방문자와 만남의 기회가 넘쳐나는 것 같지만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공간이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으므로 같은 역사도, 같은 운명의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운명은 나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엇이다.

나의 손발이 닿는 세계,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로 삶을 좁혀야 한다. 직접민주주의, 지역자치, 공동체 운동, 참여와 같은 말들이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범위만을 나의 세계로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오래도록 망각해왔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다. 얼굴도 모르는 위층 아이에게 감정을 지배당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아이는 단지 이름 없는 점 하나가 아니었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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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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