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할 때 가장 힘든 작업이 책 옮기기라는 것을 많은 사람은 안다. 책장에 놓여 있을 때보다 존재감을 더 드러내는 것이 흩어져 있는 한 권 한 권인 것이다. 8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할 때, 처분해야 할 만여권의 책을 두고 얼마나 큰 내적 갈등과 변덕과 결정 장애를 겪었는지. 언젠가 읽을 것이며 언제든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거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데려온 책들이었다. 한데 그 만여권에 대한 애착은 의외로 수월하게 놓을 수 있었다. 대체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자책 시대가 시작되면서 책이라는 물체 자체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 옅어진 시점이었다. 필요하면 바로 검색해서 내려받을 수 있으니 언제라도 갖고 있는 셈이다, 라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갖고 싶은 책을 안 사기 너무 어렵다. 다시 책장을 늘리고 있는 형편이다.

요즘 신간은 종이책과 전자책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니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데, 꼭 종이책을 사고 만다. 종이책은 어떤 전자적 부팅이나 새로운 기술적인 탐색 없이 그냥 단순하게 펼치면 되니까, 밥 먹을 때 숟가락을 드는 정도의 단순한 동작만으로 책의 세계에 빠질 수 있어서 좋다. 전자책이 부피가 준 대신 여러 겹의 번거로운 동작과 학습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에는 간과했다.

지금 종이책의 장점을 띄우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이책은 낡는 맛조차 좋고 전자책은 검색과 공유와 소장이 쉬우며 오디오북은 심지어 눈을 감고도 책을 읽을 수 있다. 무엇이든 고유한 장점이 있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다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 읽지 않는 책을 꽂아두었는데도 흐뭇할까. 왜 생활공간이 좁아져도, 발에 걸리는데도 책을 계속 사들이게 될까. 나는 이것을 사람의 마음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칼럼니스트가 사석에서 고백했다. 원고를 막 쓰려고 할 때, 머릿속에서 뭔가 생각이 맴돌고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 책장에 손을 뻗어 아무 책이나 뽑는다는 것이다. 그날의 운세처럼 자신이 사놓은 책 중 하나가 무슨 영감을 줄 거라는 기대감에. 그 기대감에서 벗어나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는 ‘원고 쓰기 비법’ 같은 것을 토로했다. 문장이 문장을 부르고 책의 기운이 원고 쓰기에 스며든다고나 할까. 일견 미신 같아도, 쓰려는 주제와 가까운 책에서는 명확한 논거를 얻고, 전혀 다른 차원의 책에서는 신선하거나 엉뚱한 발상이 떠올라 일단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움을 찾기에는 종이책이 쉽더라는 얘기.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이 글을 쓰기 전에 번역본이 아직 출간되지 않은 일본의 <독서와 일본인> 교정지를 들췄다. 묵독과 음독, 그리고 전자책 시대의 독서까지 수치와 근거를 바탕으로 일본의 독서사를 다룬 원고다. 이 원고를 스르륵 넘기다 무슨 영감을 얻었는가 하면 내가 책을 왜 잘 못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리되지 않던 것을 이 원고는 명쾌하게 정리한다. 

“종이책 이전에도 기원전 4000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시작하여 고대 인도의 나뭇잎 책, 이집트나 그리스의 파피루스 책, 중국의 죽간본, 중동이나 유럽의 짐승 가죽 책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는 자연물에 정착시켜 그것을 말거나 철하거나 한 것이다. 그것이 인류에게 있어서 책이었다. 21세기 서두에 이질적인 책들이, 돌연 대량 판매 상품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명멸하는 빛의 점으로 만들어 휴대가 가능한 것. 정착은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그것이 전자책이다.”

‘정착은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명멸하는 빛은 어떡해야 온전히 소유될까. 그 답을 몰라 아직도 책은 종이책이라는 미련을 품는다. 책장에 꽂힌 다양한 타이포의 제목만 읽고 말놀이를 하거나, 같은 계열의 색상인 표지를 늘어놓고 감상할 때도 있다. 나의 소중한 책들을 가지고서. 이런 즐거운 놀이를 다른 물건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컵을 모으고 어떤 사람은 펜을 모은다. 또 어떤 사람은 골동품을 모은다. 모으는 종류는 달라도 이유는 한결같다. 모으면 즐겁고 모아놓은 것이 흐뭇해서다.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라면, 인공지능(AI)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다. 

나는 책을 모은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삶을, 생각을 정리한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내가 모아놓은 책들에 정착한 셈이다. 내가 책을 샀지만, 그 책들이 나를 받아들이고 정착시켰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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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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