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초, 이젠 한참 전이지만 그때 강의에서 20세기 영화를 예로 들면서 수업을 하면,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강의에 영화를 끌어들여 쓰는 이유는, 나와 학생들이 모두 본 공통의 텍스트 위에서 이야기를 하면 주제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학생들이 보지 않은 영화 이야기를 해서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내 또래 친구들에겐 익숙한 영화들이 학생들에겐 낯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생긴 해프닝. 그 이후에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생기면 나와 듣는 사람이 어떤 공통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을지 생각을 많이 한다. 

공통의 텍스트가 떠오르지 않으면 공통의 텍스트로 삼을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이틀 전, 주말에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서 ‘제12회 우리대전 같은 책 읽기’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그동안 ‘올해의 책’으로 뽑혔던 책들을 전시해 두었다. 편혜영, 구병모, 한강 등 반가운 이름들이 보인다. 올해의 책은 전치형의 <사람의 자리>. 다른 해와 달리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한 에세이가 선정되었다. 

과학을 다룬 책으로는 드물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쉬운 글이었다는 뜻인데, 객석에 앉아 낭독을 들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낭독자가 책 속의 글 중에서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를 뽑아 읽었다. 제주도 특성화고 학생 이민호가 현장 실습 중 사망한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현장실습생은 사람 같지 않은 기계 옆에 혼자 남겨졌다. 프레스에 몸이 눌릴 때에도 혼자였다. ‘파렛타이저 혼자 보고 있습니다.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 관리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혼자 기계를 돌보다가 죽었다. 1970년 이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계속 들어왔던 한국 사회가 2017년에는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공손해서 더 아픈 부탁이다.”(인용)

이런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슴 아픈 사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라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다. 

낭독과 북토크가 이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내 생각은 ‘한 책, 한 도시(One Book, One City)’ 운동으로 옮겨 간다. 1998년, 미국 시애틀의 공공도서관에서 시작했던 프로그램이 2001년 시카고에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선정해 함께 읽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해하면서 우호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앵무새와 편견, 혹은 다른 이유로 ‘어떤 것’을 해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겹쳐 쓴 소설인데, 사람들은 수많은 토론과 치유의 과정을 통해 갈등과 화해의 문제를 생각했다. 

이후 이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순천에서 시작해서 부산, 원주, 청주, 대전 등 많은 도시들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다.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시도 자체를 끔찍해한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이런 독서꿀벌무리를 싫어한다. … 떼거지로 몰려나가 모두 함께 치킨 맥너겟을 먹거나 진저리쳐지는 일을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그렇다. 서울 시민 1000만명이 모두 같은 책을 읽고 같이 보는 것은 호러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블룸의 걱정은 기우일 것이다. 같이 책을 읽자고 청한다고 모두 읽지도 않을뿐더러 일 년에 한 권쯤,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는 것이 집단적인 착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한 권의 책이 전국적인 베스트셀러로 기계적으로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에 맞게 세심하게 준비되고, 그 책과 관련된 전시, 공연, 그리고 읽기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제공된다면 독서율을 높이면서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민주 정치의 훈련을 겸하는 훌륭한 시도가 되리라 믿는다.

대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각 도시의 이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찾아보고 지도를 그려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운동들이 번성하는지, 힘을 잃었는지 궁금하다. 어떤 공통의 텍스트를 골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지를 훑어보면 이 시대의 문제와 그것을 건너는 방법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려본 지도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는 데 힌트가 되지는 않을까?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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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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