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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확대된 격차는 일본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큰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함을, 빈곤한 사람은 빈곤함을 각각 자각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부유함의 정도에 따라 분명히 분단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의식에서도 나타난다. 거의 일관되게 일본 정치의 중심을 짊어온 자민당은 확대된 격차의 한쪽 끝으로 지지축을 옮기고, 부유층 정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현대 일본 사회는 ‘격차사회’ 등 미적지근한 말로 형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명한 ‘계급사회’다.”

이론사회학자인 와세다대학 인간과학학술원 하시모토 겐지 교수는 <신·일본의 계급사회>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는 “계급이란 수입이나 생활 정도, 그리고 생활 방식과 의식 등의 차이에 의해 차별된, 몇몇 종류 사람들의 모임”인데 “각 계급 간의 차이가 크고, 그 차이가 큰 의미를 가지는 사회를 계급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일본 사회의 구조는 계급사회에 관한 기존의 이론과 학설이 상정해온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명백히 계급사회로서의 성격이 강하기에 ‘새로운 계급사회’ ”라는 것입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는 어떨까요? 일본과 비교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도성장기에는 집집마다 TV와 에어컨, 자가용 등 내구소비재를 갖추게 되면서 부유함의 정도는 달라도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극빈자가 줄어들었으니 격차가 커졌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빈곤율이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금 융자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안정된 직장에 다니지 못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저임금의 불안정한 직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연애·결혼·출산 등을 포기한 3포세대로 불렸지만, 지금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 없는 N포세대가 되었습니다.

지가와 주가 상승에 의해 사회의 공평함이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자산 격차는 상속에 의해 다음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금수저·흙수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희망이 있던 시대가 ‘완전히’ 저문 사회가 되자 이제 젊은이들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노래하는 에세이에 깊게 빠져들었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 같은 정서를 노래한 에세이가 서점과 서가를 도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계급사회가 맞습니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수준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뜻하는 저임금노동자 비율이 2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 2위를 다투니 말입니다.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으로 상징되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600만 자영업자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아 ‘포용적 성장론’으로 말을 바꿔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겠지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소설적 상상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봅니다. 소설적 상상력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만들고 자신의 상상력을 키우게 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은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3000만 인구 중 300만명이 희생된 한국전쟁을 겪고 18년 장기독재정권의 지배를 받을 때는 소설적 상상력이 넘쳐났습니다. 저유가·저금리·저달러 등 ‘3저 호황’과 노동자의 희생으로 경제만큼은 살아나던 5공화국 시기 정권은 그것을 기회로 반대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일삼았습니다. 그때 대하역사소설이라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작가들의 현실에 대한 참여도 활발했습니다. 덕분에 1987년의 6월항쟁으로 형식적인 민주화라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많은 작가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견작가들마저 에세이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에 제대로 발언하는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표절 파동이나 성추행 파동 탓이라고만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가들의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은 탓인지 세상에는 네 탓만 존재합니다. 정치인들도 스스로 대안을 내놓을 자질이 없으니 상대편이 추락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인공지능이 일상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시대라 소용돌이(보텍스)가 한 번 치면 기존 프레임이 모두 무너지니 대응할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설적 상상력은 필요합니다. 소설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등단 30년 기념작인 <해리>(해냄)를 읽었습니다.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9년간 309명이 사망했음에도 이를 운영하던 가톨릭 대구대교구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대구 희망원 사건’이 얼개를 이룬 소설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미 공고한 계급사회가 되었음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더군요. 이 소설은 전작 <도가니>와 함께 법학자인 김두식이 ‘불멸의 신성가족’이라 칭한 기득권 세력들이 오직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어디까지 야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히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더군요.

1980년대에 한 시인은 대한민국의 모든 시인이 무등산을 한 삽 두 삽 퍼가는 바람에 무등산이 사라졌다고 노래했습니다. <해리>에는 “박근혜 욕만 하면 다 투사인 줄 아는지……. 이명박근혜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모두 눈이 멀어버린 것 같아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은 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계급사회가 공고화되는 걸 막기 위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소설부터 읽읍시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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