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사춘기 시절 갈 곳 몰라 헤맬 때 더러 꼰대 같은 소리를 해댔다. 골짜기에서 얼른 능선을 타라. 그 방법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아니하고 그저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게 상책이라고만 했다. 어떤 자리에서는 주워들은 풍월로 그만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말도 충고랍시고 던지기도 했었다. 내 마음조차 어디 있는 줄 깜깜 모르는 주제에 마음 운운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퍽 가소롭기만 하다, 아무튼.

산에 가서 깔딱고개 몇 개 넘으면 능선을 만난다. 그 능선에 서면 이런저런 생각이 몰려온다. 생명은 바다에서 왔다지만 최초의 사람은 산에서 성큼성큼 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 깊이를 짐작 못할 침묵의 덩어리인 바위를 관찰하면 이 또한 바다에서 융기한 흔적이 있으니 마냥 터무니없는 생각만도 아닐 터다. 오르기는 어렵고 내려가기는 더 어려운 법이라 했다. 그러니 저 아래 세상이란 잘되기는 무지 어렵고, 잘 안되기는 너무나 쉬운 현장이 아닐까, 아무튼. 

설악의 능선은 겨울에도 좋지만 여름에 가면 더 좋다. 봉우리 이름이 주는 뜻을 가늠하다 보면 하늘의 한 별자리를 짚어나가는 기분에 발길도 가볍다. 한계령에서 올라 귀때기청을 곁눈질하고 끝청, 중청 그리고 대청으로 이루어진 ‘설악좌’를 순례하는 기분이란!

오늘의 행로는 끝청을 지나고 잠시 멈췄다. 중청대피소를 지척에 둔 바위들 틈에 야생화가 잔뜩 피어 있다. 높은 산중인데도 그 이름이 등대시호란다. 꽃은 뿌리-줄기-잎-대궁-꽃의 일반적인 모양을 따르지 않는다. 기하학적 구조가 특이하고 자잘한 꽃을 들여다보면 하도 오묘해서 눈알이 뱅뱅 돌 지경이다. 이 꽃안을 ‘등대시호좌’로 명명해 줄까. 

캄캄한 바다를 밝히는 등대로 짐작하고 이 높은 산도 결국 바다에서 왔다는 한 근거로 삼으려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등대시호는 등잔을 거는 대에서 따온 이름이라 했다. 사무실 한편에 호롱과 양초를 모두 놓을 수 있는 녹슨 등대가 있다. 시골 큰집에서 쓸모를 잃고 뒹구는 것을 수습해온 것이다. 저 등잔불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던가. 내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꿈을 눅진하게 담은 듯한 설악산의 등대시호.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소와 고사리  (0) 2019.08.13
각시수련  (0) 2019.08.06
설악산의 등대시호  (0) 2019.07.30
계요등  (0) 2019.07.23
설악산 대청봉의 바람꽃  (0) 2019.07.16
백두산의 왕죽대아재비  (0) 2019.07.0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