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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예년 같으면 술 약속이 이어질 연말인데 모든 송년모임이 취소되었다. 수도권은 5인 이상 사적 모임 집합금지가 행정명령으로 시행되고 있다. 연말연시 방역을 최대한 강화하려는 특단의 조치로 이해한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반가운 이들과의 자리에 빠지기 어려운 술 이야기로 달래본다.

<한서>에 의하면 술은 ‘하늘이 내린 멋진 선물(天之美祿)’이고 ‘온갖 약 가운데 으뜸(百藥之長)’이다. <시경>의 여러 시에서도 노인을 봉양할 때나 친구와 어울릴 때나 꼭 필요한 것이 술이라고 노래했다. ‘근심을 잊게 만드는 물건(忘憂物)’은 도연명이 술에 붙인 별명이다. 위나라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술꾼들이 청주는 성인(聖人), 탁주는 현인(賢人)이라는 은어로 부르며 몰래 마시곤 했다. 당시 서막이 술을 마시다 적발되자 “성인에게 걸려들었다”며 익살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고려 후기 문인 이곡이 전주에 들렀다가 장항을 만나 낮술을 마셨다. 얼근해진 술에 시를 주고받는다. “주벽(酒癖)으로 행세하는 전부 선생, 시웅(詩雄)으로 이름난 눌재 상국. 완산서 만나 낮술 한판을 벌리니 인간만사 한바탕 웃으면 그만이로다.” 전부 선생은 이곡 자신이고 눌재 상국은 장항을 가리킨다. 장항의 화답시에 이곡이 한 수 더 짓는다. “말 잃는 일의 화와 복은 이미 알았지만, 까마귀 암컷 수컷은 구분이 안 되네. 시단에는 장 상국이 최고 자리 앉으시게. 주성(酒聖)에는 이 서생이 수시로 걸려들 테니.”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뒤바뀌곤 하는 화와 복에는 초탈한 지 오래다. 하지만 저마다 잘났다고 나서는 소인배들, 그중 누가 낫고 누가 못한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술을 성인으로 모셔 기꺼이 걸려들며 살아가련다.

이곡의 시대라고 해서 어려움과 답답함이 없었겠는가. 오랜 무신 집권으로 피폐해진 정권이 원나라에 복속되어 가던 암울한 시기였다. 관료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민생은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기에 더욱 모처럼 마음 맞는 이와 만난 순간을 즐기며 시와 술을 벗 삼아 호탕하게 웃은 것이다.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소중한 이들과 교감하며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진정 필요한 때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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