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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다시, 선물과 감사

경향 신문 2020. 10. 16. 10:26

나는 지난달 칼럼에서 이타적 행위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장기기증법이 오히려 선물과 감사의 연쇄를 끊음으로써 공동체의 불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후 여기저기서 장기기증을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 글의 취지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난번 칼럼에서 노린 것은 이타적 선물 증여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한국 사회의 허위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다. 장기기증법은 자기 가족의 장기를 모르는 타자에게 선물로 거저 주고 그 운명에 대해 완전히 잊으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일방적 증여는 사회적 삶의 바탕이 되는 호혜성의 원리와 모순된다.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은 감사를 통해 호혜성을 갚을 수 없다. 행여 감사 표시가 장기 매매로 변질될 것을 막기 위해 법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장기는 현재 가족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가족 재화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장기기증법은 장기를 이타적 선물로 익명의 타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주라고 강제한다.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호혜성 없이 전적으로 주기만 하는 일이 가능한가? <증여론>에서 마르셀 모스는 강력한 사회적 연결망 안에서 공동의 도덕으로 엮인 성원들이 의무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증답(贈答) 경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어야 하는 의무-받아야 하는 의무-되돌려주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재생산된다. 선물의 이타적 증여란 결국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외부의 압력을 내면의 자유로 가장해서 벌이는 ‘집단 기만’이다. 이러한 냉소적 해석에 따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족끼리 이루어지는 장기기증은 자기 가족만의 연대를 위해 벌이는 집단 기만극인 셈이다.

하물며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장기기증은 어떠하겠는가? 장기를 모르는 타자에게 자발적으로 증여하고,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도 말고 완전히 잊어버려라! 받는 사람도 누가 주었는지, 그 가족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무지 속에서 살아가라! 그러면 자발적 증여가 돌고 돌아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결속이 강해질 것이다. 이런 망각과 무지를 정당화하는 집단 기만을 통해 공동체의 불멸은 둘째치고 생존이나 가능할까?

사회는 존속하기 위해 집단 기만을 꼭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행위자는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스스로 기만하며 행위를 한다. 장기기증법은 한국 사회가 이러한 냉소적인 기능주의적 사회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도덕과 법 모두 행위자의 자발성을 가장하는 집단 기만 위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실상 도덕은 약자의 원한 감정이요, 법은 강자의 권력 도구이다. 약자가 원한 감정에 휩싸여 법 제정을 울부짖으면, 강자는 옳다구나 법을 만들어 권력 도구로 활용한다.

사회학자 지멜의 ‘감사’ 개념은 이런 시각을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다. 사회적 삶은 먼저 온 자가 나중에 온 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선제적으로’ 선물로 줌으로써 그의 내면을 일깨울 때 비로소 시작된다. 받은 자는 감사하는 마음에 자신의 영혼으로 되돌려주려 하지만 준 자는 이미 영혼을 가졌기에 아무리 갚아도 부족하다. 자연 둘의 도덕적 채무 관계는 무한해지고 받은 자는 내적 의무로 그 관계에 헌신한다. 그런데도 감사를 하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다. 아무리 내적 의무라지만, 의무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먼저 선물을 준 자가 그러했듯, 나중에 온 자에게 선제적으로 선물을 증여해 그의 내면을 일깨우고 감사로 되돌려 받을 때 마침내 자유인이 된다. 결국 자유인의 공동체를 불멸할 수 있게 하는 건 집단 망각이나 집단 기만이 아니라 ‘선물과 감사의 무한 연쇄’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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