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군을 몰아내려 사람들이 박원종의 집에 모여 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수군댑니다. 다들 설왕설래하는데 구석에 앉은 한 사람만 말없이 이쪽을 지켜봅니다. 사람 숫자를 세어보니 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아무래도 염탐꾼이 들어온 것 같소.” 귀띔하니 박원종이 잠시 바라보곤 껄껄 웃습니다. “염탐꾼이 아니라 내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요. 누가 거기에 도포와 갓을 얹었구려!” 이 일화에서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묵묵히 따로 있다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이 나왔다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박원종은 당시 정2품 중추부지사였고, 지금의 도지사, 군단장, 참모총장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고위직을 두루 거친 양반이 아무렴 먹을 게 없어 쌀도 아닌 보리를 꾸어다 놨겠습니까? 늘 강조하지만, 유래담 대부분은 있는 속담에 맞춰 지어낸 것들입니다.

보리는 쌀보다 까끄라기가 깁니다. 가볍지만 부피는 더 나가고요. 그래서 쌀자루보다 조금 큰 보릿자루에 담아야 무게가 비슷해집니다(도정 않고 보관하다 밥할 때 절구질로 껍질 벗겼지요). 그런 보릿자루가 서지 않고 앉았다는 건 보리조차 넉넉하게 꾸지 못해 자루가 처져 접혔다는 말입니다. 먹자니 며칠이면 동나겠고 안 먹자니 배고파 죽겠고, 얼마 안되는 그 보릿자루만 바라보겠죠. 그렇게 허기진 갈등 속에 보릿자루는 주둥이 꽉 묶인 채 아가리 한 번 툭 못 엽니다. 입 꾹 닫고 앉아만 있는 사람과 똑같지요. 그리고 ‘배고프다’는 ‘손가락이 곱다’처럼 ‘배가 굽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굶으면 뱃심이 없어 자연 허리가 휘어 배가 굽습니다. 이를 빗대 말할 기운도 없이 굶고 앉은 모습을, 부실하게 꾸어다 놓아 푹 접힌 보릿자루로 표현한 게 그 시초 아닐까 합니다.

명절이면 정치 논쟁과 훈계에 귀가 따갑습니다. 똑똑한 요즘 아랫사람들이 입 꾹 닫고 보릿자루인 건 ‘할많하않’입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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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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