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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수프와 이데올로기

경향 신문 2022. 11. 24. 10:54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북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다 보면 굽은 길을 정면으로 품고 있는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아빠는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그 평범한 야산을 지날 때마다 ‘저 산의 능선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누워 계신 모습 같다’고 하며 산등성이를 손가락으로 이어 눈, 코, 입을 그린다. 아빠의 애절한 충성심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과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충북 옥천 부근에선 서글픈 애도가 된다. 그렇게 눈물을 훔친 아빠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가는 동안 망해가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한다. 나는 아빠의 입에서 ‘네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찬양과 비관을 밀어낸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언제나 ‘정치 이야기만 안 하면 우리 가족은 화목하다’는 아빠의 휴전 선언으로 끝이 난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감독이 25년에 걸쳐 완성한 ‘가족 3부작’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작품이다. 2005년과 2009년에 개봉했던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통해 ‘재일조선인’이라는 디아스포라 집단을 세상에 소개한 감독은 오사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오빠 셋의 ‘귀국’(북송)’을 겪고 부모님과 반목하며 성장한 인물이다. 전작이 ‘북조선’의 체제를 맹신하는 전체주의자 아버지, 북한으로 건너간 오빠와 조카들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치매로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강정희씨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한 어머니의 과거를 따라가다 ‘제주 4·3사건’이라는 뜻밖의 비극을 마주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질식할 것만 같았던’ 가족에게서 해방되기 위해 시작한 25년간의 치열한 그의 기록은 내가 만난 모든 가족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었다. 긴 시간 가족을 관찰하며 그것을 토대로 ‘나’를 탐구했던 양영희 감독은 3부작을 통해 ‘가족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결말에 도달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 사이에 생긴 갈등과 오해를 끌어안고 부모가 살아온 비극의 증언을 끌어내며 한 가족의 역사가 개인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확인시킨 뒤, 영화는 일본인 사위를 반대하던 어머니가 감독의 일본인 남자친구를 환대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정치적인 것’을 다시 사적인 이야기로 환원한다. 서로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함께 ‘닭 수프(백숙)’를 끓이는 데 집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작동되는지, 나와 내 가족이 왜 서로에게 ‘정치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 정부와 여당이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주장할 때, 나는 그 문장 속에 있는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아빠의 말속에 있는 ‘정치 이야기’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아빠 말은 옳았다. 정치를 소재로 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라는 금기를 인식한 순간부터 우리의 대화는 더 깊어지지 않았다. 

가족이란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정치적인 관계인데 소재의 제한이 생기자 그런 긴밀한 구조 자체가 삐걱거렸다. ‘정치적 이용을 운운하는 제약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위’라 하며 정부에 참사의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듣고 나니 나는 ‘정치’라는 포괄적인 단어 속에 의도적으로 중첩되고 왜곡된 의미를 구분할 수 있었다. ‘(중앙)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이란 집단의 정치적 성질까지 사라질 수는 없다.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정치’에 대한 침묵이 아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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