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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

경향 신문 2021. 4. 1. 09:47

백악관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미드 <웨스트 윙>에는 미국과 인도가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은 이 협정에서 3만개의 고임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 대가는 1만7000개에 달하는 미국 내 개발자를 해고하고 인도 현지의 저임금 인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비서실 차장이 ‘해고’에 반발하자 비서실장은 “1만7000을 잃는 대신 3만을 얻는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말한다. 그때 차장이 하는 말. “사람들이에요. 추상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가 선거운동 중 편의점과 대학교에서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청년의 야간노동에 대한 고충을 들었다는 박 후보가 점주에게 ‘야간 무인편의점 운영’을 건의했고, 번역 일자리가 적어서 걱정된다는 통·번역 대학원 학생에게 ‘AI를 활용한 번역 플랫폼 일자리’를 소개해줬다는 이야기다. 노동의 어려움을 얘기했더니 일자리 없애는 걸 대안이랍시고 제시하느냐며 곧장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박 후보의 말에는 맥락이 있다. 무인편의점은 야간에 창출한 비용으로 주간 일자리의 시급을 높이는 규약을 맺겠다는 것이다. 그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시절 추진한 사업이다. 번역 일자리는 번역가를 AI로 대체한다는 뜻이 아니라, 프리랜서 번역가들이 각자 번역을 올리면 AI가 개중 가장 나은 번역을 채택해 제공하는 서비스 얘기다.

하지만 현실에서 청년들이 야간노동을 택하는 이유는 주간에 일할 시간이 없어서인 경우가 많다. 이런 청년들이 무인편의점의 혜택을 입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 시행되고 있는 사업에 박 후보의 취지가 반영돼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해당 번역 일자리는 10분짜리 유튜브 영상 1건을 번역할 때마다 2만원을 지급하는데, 프리랜서 1인당 한 달에 평균적으로 10건 정도를 번역한단다. 전문 번역가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는 학생이 소개받기엔 당황스러운 일자리다.

관(官)이 일자리를 대하는 태도가 종종 이렇다. 어떤 일자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떤 일자리가 또 다른 일자리로 얼마나 대체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둔다. <웨스트 윙> 비서실장의 말처럼 “1만7000을 잃는 대신 3만을 얻으면” 된다고 믿는 식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니, 신성장동력이니 하는 정책들을 관은 사랑하는 걸까. 새로운 영역이니 분명 일자리 창출과 경제적 파급효과가 예상될 터다. 그런데 그 보고서에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들의 얘기도 적혀 있었을까. 간담회장에 노동자의 자리는 있었을까. 거기가 정말 ‘현장’ 맞나.

물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정책을 숫자로 판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청년들 면전에 대고 할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 게 박 후보의 실수다. <웨스트 윙>의 비서실 차장도 현장을 모르는 엘리트지만, 그는 선거운동 때 만난 프로그래머들의 ‘얼굴’을 알기 때문에 해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박 후보는 청년들의 얼굴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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