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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쉬어 갈 결심

경향 신문 2022. 8. 4. 11:03

환자가 되었다. 검진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는데 본격적인 치료는 지루함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주사를 맞지 않아도 진통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고 병실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루틴을 찾았다. 매일 하는 각종 기본 검사를 마치면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과 가운을 입고 병원 안을 걷는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때 편의점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사서 병실로 돌아와 그것을 마신다. 걷는 것은 지금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의식과 같아서 갑작스러운 외부 검사 일정이나 컨디션 문제로 걷지 못하게 되면 하루 종일 좌절감에 빠진다.

처음엔 대학병원의 구석구석을 걷는다는 게 그저 좋았다. 침대를 벗어나 의사, 간호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러나 증축과 보수를 거듭해 거대한 미로가 된 병원을 매일같이 헤매면서 빠르게 깨달았다. 병원의 풍경이란 건 결코 좋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의료진의 긴장감과 환자들의 절박함을 애써 모른 척하며 빠르게 걸으면 병원의 숨은 지대들이 보인다. 건강검진센터 앞의 라운지엔 등받이가 없는 의자들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어 늦은 밤이나 주말엔 병원 시설 관리자들이 그곳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항상 붐비는 중앙 엘리베이터를 지나면 신관과 구간을 연결하는 좁은 계단이 있는데 에어컨 바람 하나 들지 않아 푹푹 찌는 그곳은 청소노동자들이 쉬는 곳이다.

환자들을 위한 병동 휴게실에선 종종 긴 이야기가 오고 간다. 대부분 아픈 설움에 대한 주제로 말을 하다 보니 보호자, 간병인, 간호사, 의사에 대한 설움이 터져 나올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처음엔 다 따로 자리했던 환자들도 결국 중간으로 모여 서로 위로를 하며 그 자리에서 원망을 해소하기도 하고 불편한 시설에 대한 목소리를 병원에 전달하기도 한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쉴 수 있는 휴게실은 길고 막막한 투병 생활과 늘 고된 일상을 보내는 간병인들의 숨통을 틔우는 절실한 공간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클리닝 업>은 증권회사에서 청소 노동을 하는 세 명의 여성이 회사 내의 불법적인 내부자 거래 정보를 입수해 본격적으로 주식 투자를 한다는 내용이다. 동명의 영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은 정보 입수 과정의 서스펜스를 부각하는 동시에 다양한 레이어를 입힌 중년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세 미화원은 무모하다 싶을 만큼 대담한 도청을 통해 내부자 거래 정보를 입수하지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주식 투자에 성공한다. 돈이 늘수록 이들은 점점 회사와 사회에서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자신들의 처지, 온몸에 피멍이 들어도 쉴 수 없는 노동 환경, 관리자의 고압적인 태도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돈을 가져도 회복되지 않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쉴 의자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간이 휴게실, 남자 관리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탈의실, 어디를 가도 자신들을 감시하는 것만 같은 빌딩 구석구석. 결국 이들이 작전모의를 하는 곳은 서울에서 부천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 안이다. 2년 전 ‘청소 상태 미흡’이라는 이유로 집단 해고를 당했던 80여명의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이 생각난다. 이들 역시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6411번 버스 안에서 서로 유대감을 나누다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해고의 실질적 사유였다. ‘바쁘게 만들어 쉴 시간을 없애거나, 한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없애거나.’

오늘도 병원 안을 유령처럼 걷다가 기둥 뒤 의자에 몸을 숨겨 통화하는 미화원을 지나치며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의 말이 생각났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하루 만 보를 채우는 동안 내가 걸은 복도는 참으로 깨끗하고 쾌적했지만 그 가치는 당연한 듯 형편없이 매겨지고 있었다. 쉬지 못해 건강을 잃은 나는 이제 함께 쉴 결심을 하고 싶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연재 | 문화와 삶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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