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크기가 그리 심하지 않은 나라를 찾아가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그 비결을 묻는 시사프로의 한 장면이다.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게 된 이유를 알려달라는 말에, 자국의 복지체계 자랑을 밤새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답변이 이렇다. “그건 모르겠고요. 아직 이 사회에는 문제점이 많아요. 제가 할 일은 지금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일은 조금이라도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복지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제도를 정비하려는 걸 방해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고정관념도 깨야 해요. 그게 제 의무예요.”

과시를 해도 될 상황에서, 아직도 곳곳이 엉망이라 갈 길이 멀다는 태도를 보인다. 좋은 사회는 이처럼 ‘나쁜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많아야지만 가능하다. 사회가 아름다운 수식어로만 꾸며지면 분명히 존재하는 비상식적인 모습들이 쉽사리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는 사람들이 맹목적 긍지로만 뭉쳐 “이 나라는 완벽해요! 차별과 혐오는 생각도 할 수 없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회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항의가 ‘객관적으로 나아진 현실을 부정하는 배배 꼬인 생각’이라는 냉소에 막혀버린다. 한국처럼 말이다.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단군의 후예, 열정과 성실로 무장한 국민정서 등등, ‘찬란한 역사에 자긍심을 지니자’는 무한 긍정의 강요 속에 듣기 좋은 말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했던가. 이런 노출에 단련된 대중은 이렇게 내뱉는다. “그 덕에 우리가 잘살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 나라에 감사하자!”

팩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사회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순간에도 불평등에 노출되어 삶이 위태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지속적으로 그 방향성이 유지된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불평등조차 낙관하라는 태도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한 사회의 불평등을 탓하는 건 확증편향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걸 무시하고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망상에 빠지는 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착각이다.

곳곳에 첨단 시설이 즐비해졌다는 팩트는 아무리 더워도 휴게실에 창문 하나 낼 수 없어 생을 마감한 ‘그’ 노동자의 비극을 덮을 수 없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과거보다 줄었다고, 허술한 안전장치 때문에 끔찍하게 죽는 ‘그’ 노동자의 불행이 기쁨으로 둔갑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배달되기에 개인들의 편리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하루 열다섯 시간을 일하는 ‘그’ 사람의 고충을 해결하지 않는다. 여성도 차별 없이 교육받는다는 변화된 통계자료가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 당사자의 오늘 불안한 마음을 줄여주지 않는다.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하고 평균수명이 증가했다는 좋은 뉴스가 비만 오면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늘’ 겪는 서러움을 치유해줄 리 만무하다. 재래식 화장실이 사라졌다고 해서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주변의 차별 때문에 ‘오늘’ 느낀 수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낙관주의자들은 ‘왜 세상이 좋아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한 적 없다. 다만, 좋은 세상은 긍정의 자세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평등한 세상은 ‘더’ 불평등한 세상을 찾아야지만 가능하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끝없이 의심하는 비관적 자세는 결과를 낙관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부정하는 건 세상의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의 익숙한 습관일 뿐이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하나의 팩트만이 부유하면, ‘그때 그 시절 덕택에’ 집집마다 자동차 굴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등장한다. 군부독재를 긍정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도 다르게 해석하는 놀라운 사람이 이 땅에 있는 이유다.

<오찬호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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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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