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서 <로보트 태권V>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나에게 소규모 연구용역을 맡긴 공공기관 직원의 전화다. 제출서류 중 주민등록초본이 빠졌단다. 연구보고서 작성보다 행정서류 정리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나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다. 

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한 손에는 어떤 서류를 뗄 건지를 적은 종이를 들고, 남은 한 손으로는 기계에서 순번표를 뽑아 민원인 의자에 앉았다. 초등학교 교실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처럼 다소곳하게 민원처리를 기다리는 사람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어르신이다. 500원을 내고 초본을 받아들었다. 폐지 줍는 어르신에게 500원은 땀이 쏟아지는 무더위에 10㎏의 무게와 수백m의 이동 거리를 의미한다. 500원은 회계상 기타수익일까 잡수익일까. 별생각을 다 하고 앉아 있다. 스트레스 상태인가보다. 이 글을 보며 ‘인터넷으로 뽑지 왜 그런 짓을, 쯧쯧…’ 하며 혀를 차는 분도 계실 것이다. 생각이라는 놈이 스트레스를 만나 좁은 공간에 갇히면, 알고 있는 일도 기억에서 꺼내오지 못하고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스트레스는 두 배가 된다. 하지만 이번 일은 스트레스가 세 배랄까.

추가적인 스트레스의 진원지는 두 곳이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왜 나보고 다시 가지고 오라는 것일까. 나의 신체적 능력과 연구용역을 하는 자의 정부 충성도를 측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나머지 한 곳은 공공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공공서비스가 신체적·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역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민원서류를 발급받는 이들은 업무공간이 실내이고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무직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보면 젊을수록, 고학력일수록, 월평균 가구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반면 읍·면·동사무소에 직접 방문하여 돈을 내고 민원서류를 발급받는 이들은 거주지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자영업자 혹은 고연령층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월평균 가구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일 가능성이 있다. 약자가 공공서비스를 받는 데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시간, 돈, 체력을 더 많이 쓰는 셈이다. 당장 읍·면·동사무소에 방문하여 민원서류를 발급받을 때 내는 500원부터 없애면 좋겠다. 민원서류는 부처와 기관별로 약 270개가 존재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약자가 역차별받지 않도록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연결된다는 지능정보화사회로 가고 있다. 최근 언론에서 불치병을 고치는 데 1회 치료비가 25억원인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것. 건강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시대를 관통하는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앞으로도 사서 먹기 힘들 정도의 가격표가 붙은 신약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러한 신약의 다수는 일반 국민의 의료데이터와 특정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의료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분석하고 학습한 인공지능을 통해 개발한 신약일 것이다. 이 신약의 주인 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신약을 얼마를 주고 사야 할까. 

지능정보화사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따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해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고, 반대로 대형자본과 최고지식을 갖춘 이들이 살아남고 중산층은 붕괴하며 초양극화 사회로 진행될 수도 있다. 지능정보화사회는 기존 사회경제 시스템의 진일보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리셋(reset)하는 차원이 다른 진화일 수도 있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 중 어떤 얼굴이 우리에게 미소 지을까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 취지에서 우선 민원서류 발급 문제부터 해결해보자.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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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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