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 지나면 휴지가 되어버리는 신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건질 게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신문 사회면의 모퉁이에서 인상적인 기사를 읽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첫 문장이 ‘나, 너, 우리’로 바뀐다는 단신이었다. 아니 이게 뭔 기삿거리인가! 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창한 시대정신이나 교육이념 따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아이에게 한 사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첫 언어는 대단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어의 첫 문장은 몇 번 변했다. 광복 직후에는 ‘바다, 나라, 가자’였다. 내가 배운 건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이리 오너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순이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였다. 천자문의 우주홍황은 아니더래도 왜 개까지 등장시켰을까.

스위치를 누르면 톡, 꺼져버리는 화면에서 며칠 전 짤막한 뉴스가 눈길을 끈다. “국립국어원이 명사 ‘됨됨이’와 ‘엉덩이’, 동사 ‘그리하다’, 형용사 ‘예민하다’ 등 몇 단어의 뜻풀이를 추가했다. (…) 됨됨이는 ‘사람으로서 지니고 있는 품성이나 인격’이라는 뜻으로만 썼지만, ‘사물 따위의 드러난 모양새나 특성’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가을 태풍에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 먼 산에 가지 못하고 유리창에 붙이는 신문지처럼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심학산에 올랐다. 늦털매미가 알뜰하게 운다. 인간처럼 말은 못하지만 몇 마디 음률로 성실하게 울다 간 올해의 보통 매미들. 일제히 종적을 감춘 여름의 처사들을 떠올리다가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요즘처럼 언어의 가치가 떨어진 때가 있었을까.

어둑한 산길. 말의 가치 하락을 궁리하는 내 머릿속과 장단을 맞추듯 숲속에서 상수리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툭 귀를 간지럽혔다. 오늘의 글감을 구하러 두리번거릴 때 개여뀌의 빨간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다. 집 근처 뒷산에서 보았다고 함부로 쉽게 볼 건 아닌 풀. 그 옛날 시골에서 잎을 갈아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던 풀. ‘개’가 붙은 독한 풀이지만 그 됨됨이를 잘 다스리면 약으로도 쓰이는 개여뀌.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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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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