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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여파로 올해 여러 기념행사들이 대폭 축소되었다. 한국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등이 그렇게 지나갔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지난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19로 인해 주어진 성찰의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10년 단위로 무언가를 기리는 관습을 따르자면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도 올해 우리가 기억할 만한 역사다.

안중근 의사를 기억할 때마다 놀라우면서 의아한 것은 뤼순 감옥 간수 지바 도시치의 이야기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여 그의 유묵을 간직하고 죽을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자기 신념을 따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안중근의 신념에 동의할 수 없는 입장에 있던 간수가 어떻게 몇 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그의 인품에 감화하여 평생 존경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리키는 ‘신념’은 이성과 믿음, 실천이 한데 어우러진 어휘다. 대개 본인은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의 영역을 전제하고 있어서 소통이 어려운 것이 신념이다. 신념이 서로 다르다면 접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관건은 이해(理解)보다 이해(利害)다.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해 찬반이 갈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는 본인이 피해를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념 때문에 다수에게 피해를 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긍정적인 지향을 담은 신념이라 해도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출발부터 특정 대상에 대한 불신과 부정으로 가득 찬 신념은 스스로를 속이고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위해를 끼칠 수 있다. 이는 반대의 신념에서 지적·윤리적 잣대로 상대를 폄하하려고만 들 뿐 자기반성을 모르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신념을 달리하는 이들로부터 용인을 넘어 존경을 받는 아름다운 신념이 있을 수 있을까? 사적인 이해관계와는 애초에 다른 길에 서서 자기희생을 삶으로 보여주신 안중근 의사를 다시 기억한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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