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일관계가 경색된 원인으로 어떤 이들은 2018년 10월30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들지만, 이것은 단순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는 시대의 목소리이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구호가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한·일 양국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는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전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냉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일동맹의 하부구조로 강요되었던 한·일동맹이 사실은 매우 불편한 동거였으며 이대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멀리 베를린 장벽에서 시작된 냉전 해체의 바람은 오랜 시간이 걸려 극동(極東)의 비무장지대까지 불어왔다. 그간 우리는 안으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밖으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분투해왔다. 시간이 흘러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해빙이 시작된다고 환호하던 바로 다음날 일본의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해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했고, 결국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했다.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이후 더 연장하지 않기로 하자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아베 정부가 한·일관계를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로 되돌리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외교적 패착을 둔 상태에서 미국 정부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는 일본에 기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과거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애치슨라인 때부터 미국이 한국을 홀대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최근 중국이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와 비교된다. 지난 9월11일 인천에서 개최된 새얼아침대화 400회 기념 조찬강연에 강사로 초빙된 추궈훙 중국 대사는 일본 정부의 대한국 수출규제와 관련해 “역사 문제를 경제제재로 풀 수 없다”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나 피해자(한국)가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하더라도 가해자(일본)는 겸허하게 대해야 한다. 최근 급격히 우경화하고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주변국들에 큰 우려를 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수출규제에 대해 한국인들의 사려 깊고 이성적인 태도는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주전장' 포스터. 사진제공 시네마달

미키 데자키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주전장(主戰場)>에서 아베 정부의 각료는 물론 자민당 의원 중 많은 수가 소속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회의의 대표위원 가세 히데아키는 “중국은 조만간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한국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가장 친일적인 훌륭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한국은 정말 귀여운 나라예요.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정말 귀엽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브레진스키가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펴낸 저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전 지구적 영향력 쇠퇴를 예측하면서 한국에는 중국과 함께 갈 것인가, 일본과 함께 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홀로 갈 것인가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자 문명이었던 중국의 흡입력을 5000년간 버텼고, 대륙을 넘보는 일본의 잦은 침략을 견뎌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족이 두 동강 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해 오늘의 위치에 이르렀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말했다. 하지만 아직 미국의 전 지구적 영향력은 쇠퇴하지 않았고, 미래의 우리가 누구와 함께 갈지 결정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홀로 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어려움과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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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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