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주변 일들이 예상 가능할 때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좋은 일은 더 좋게 되도록 준비할 수 있고, 나쁜 일은 대비하면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역으로, 예측을 벗어난 일은 달갑지 않은 경우가 많은 법이다. 예상보다 이르다는 뜻의 ‘조기’라는 말이 긍정적인 뜻 못지않게,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의외로 많이 쓰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데 요즘 여권에선 조기라는 단어가 달갑잖게 쓰인다. ‘안이박김.’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신조어가 조기 권력다툼을 지칭한 말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여권 핵심인사가 차기 주자인 ‘안희정→이재명→박원순’을 탈락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골자다. 정권 초반부터 여의도 정가를 떠돌았지만 최근 여권 상황과 맞물려 진위 논란으로 번졌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 성폭행 의혹으로 하차한 데 이어 이재명 경기지사가 각종 의혹에 휩싸인 것이 소문에 기름을 부었다. 공교롭게도 박원순 서울시장과 여권 핵심부의 관계도 편치 않아 보인다.

사실 ‘안이박김’은 한갓 뜬소문에 불과하다. 권부 핵심에서 권력기관을 동원해 2인자를 솎아낸다는 시나리오는 군사정권 시절에나 횡행했을 법한 공작정치의 패턴이다. 정치·사회 시스템이 투명해진 요즘 가능하겠는가. 심지어 권위주의 정권이었던 ‘박근혜 청와대’마저도 유승민·김무성을 제거하려다 명을 재촉한 전례가 있다. 그런데도 이 낡아빠진 소문은 어떻게 파급력을 얻었는가.

무엇보다 당사자들 처신이 문제였다. 이재명 지사는 부인 김혜경씨의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 논란, 친형 강제입원 의혹 등이 불거지자 “경찰이 진실보다 ‘권력’을 선택했다”고 했다. 검찰 기소 이후엔 “우리 안에 침투한 분열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싸움꾼’의 본능에 따른 반응일 수 있겠지만 이 지사가 사용한 ‘진실보다 권력’ ‘분열세력’ 등의 표현은 논란을 부풀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달 20일 정부의 탄력근로제 확대를 규탄하는 한국노총 대회에 참석해 ‘노동존중 시장’이라고 했다. 노동계 마음을 얻어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보였겠지만, 여권 핵심부와의 차별화 시도로 외부에 비쳤다. 세번째 임기 시작 후 옥탑방살이→강북 플랜→서울역 마스터플랜 등으로 내달렸던 그의 조급함은 스스로를 권력다툼 프레임에 옭아맸다. 자기 관리에 실패한 안희정 전 지사 잘못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이러니, 집안 내부가 조용할 리 없다. 최근 만난 여권 관계자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 ‘안이박김’의 김이 누구인지 내부에서 말들이 많다. 소설이라는데, 우리는 소설이 논픽션이 될까봐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충청권의 한 의원은 농담처럼 “안 전 지사를 탈락시켰다고 소문난 핵심인사는 당분간 충청도 땅을 못 밟을 것”이라고 했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음모론으로 번진다. 안이박김 논란은 친문재인계 낙점설로 진화했다. 여당 관계자는 “지금 나오는 대선주자들은 페이스메이커다. 안이박김을 쳐내려 한다는 핵심인사도 탈락할 것이다. 친문 적자가 차기주자가 될 것이다.” 그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친문 인사들을 거명했다. 안에서도 음모론을 믿는데, 밖에는 어찌 비치겠는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한 라디오에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 프레임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여권은 위기다. 경제는 좋지 않고 특별감찰반 기강해이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뜬소문은 빨리 번지게 마련이다. 보수야당은 ‘나라도 어려운데 싸움질이나 한다’ ‘레임덕이 시작됐다’며 흔들기를 시도한다. 탄핵 이후 숨죽였던 자유한국당 내부에선 “예상보다 빨리 기회가 왔다”는 말이 들린다.

이 지사나 박 시장도 얻은 게 별로 없다. ‘싸움은 선빵’이라지만, 이 지사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이 지사 주변 문제를 권력다툼과 연계짓는 것은 무리다. 박 시장의 조급증은 권력투쟁 논란만 불렀다. 공들여 세운 머리만큼 그의 지지율은 서지 않았다.

더는 논란을 방치해선 안된다. 내부에서 의혹을 키운 측면이 있는 만큼 진화의 몫도 여권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는 지난 12일 페이스북에 이재명 지사를 두둔하며 “어려운 때일수록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했다. 권력투쟁 논란을 원치 않는 대통령 의중이 반영됐을 터다. 당사자들도 자중해야 할 것이다. 이 지사는 본인의 말처럼 중앙정치에서 발을 빼고 ‘백의종군’해야 한다. 박 시장에겐 반 발자국 늦게 걸을 것을 권한다. 여권 지지율이 하락하면 두 사람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문도 닫힐 수밖에 없다. 빨리 끓는 물은 빨리 식는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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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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