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의혹 중 하나인 미르·K스포츠 재단에는 국내 16개 주요 그룹이 관여돼 있고 이 중 상당수는 현재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 대상이다. 국내 주요 그룹들이 한꺼번에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은 2003~2004년 옛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불법대선자금 수사 이후 오랜만이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 두 사건은 권력과 재벌의 ‘정경유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미르·K스포츠 재단의 기업 출연금 774억원에 삼성이 최순실씨 일가에 별도로 제공한 것으로 확인된 90여억원을 합하면 대선자금 수사에서 한나라당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파악된 823억원과 비슷하기까지 하다.

13년 전 검찰은 천문학적인 불법자금이 정치권에 흘러간 배경에는 한국 재벌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이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2004년 5월21일 대선자금 수사 최종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업지배구조의 고질병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밝혔다. 안 중수부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부당 내부거래를 통한 변칙적 부의 세습, 지배권 유지, 분식회계 등 불투명한 기업 경영은 정경유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선진경제로의 진입에 걸림돌이 된다”는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이와 관련된 8개의 구체적인 기업 범죄 유형을 제시하고 향후 철저한 수사까지 공언했다. 한국 대기업들이 총수 1인이 황제경영을 하는 지배구조의 약점 때문에 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닷새 전 안 중수부장을 따로 취재하면서 비슷한 소회를 들었다. 당시 그는 대선자금 수사를 하면서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재벌그룹들이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검은돈을 정치권에 제공하는 것도 사업 인허가 등 경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총수의 편법 상속·증여 등을 봐달라는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얘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같은 정경유착의 근본적 원인은 알 만한 사람들에겐 상식이나 마찬가지지만 ‘1면 톱’(경향신문 2004년 5월17일자)에 기사를 올렸다. 그걸 한국 검찰이 드디어 깨달았구나 하는 기대감에서라고나 할까.

대선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를 깨끗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 틀림없다. 대선·총선 때마다 기업들이 거액의 검은돈을 정치권에 갖다 바치던 관행은 이후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 불법대선자금을 제공한 기업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주요 그룹의 총수들은 소환조사조차 받지 않았고 2인자 전문경영인들이 불구속 기소되는 선에서 처리가 마무리됐다. 수사의 타깃이 정치권이고, 기업들로부터 정치권에 제공한 검은돈을 자복받기 위해 검찰이 기업 처벌을 최소화한 결과다.

안 중수부장이 깨달은 기업지배구조의 문제점은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이번 사건에서 재현되고 있다. 특검의 수사 대상 기업들 모두 총수 문제가 연루돼 있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문제, SK와 CJ 등은 각각 최태원 회장과 이재현 회장의 사면 문제, 롯데는 신동빈 회장 일가의 경영권 분쟁 등이다. 검찰 수사 결과인 박근혜 대통령 측의 강요이든, 특검이 의심하는 뇌물 혐의든 마찬가지다. 지배구조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문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미래 경영전략을 짜지 못한다거나 한국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는 등의 곤혹과 논란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이재용 부회장 등이 그룹을 완전히 지배하는 이른바 ‘오너’가 아니라면 이들 기업은 사력을 다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전문경영인이라면 불법행위에 연루됐을 때 기업 이사회는 이들을 해임하고 소비자에게 사과한 뒤 깨끗한 인사를 새로운 최고경영자에 앉히고 새출발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도 ‘재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공전의 히트곡도 시간이 지나면 흘러간 유행가가 되는 법인데 한국 사회에서 재벌개혁 구호는 수십년 동안 질리지도 않는지 인기를 이어간다. 그만큼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재벌개혁은 외부에서 강제하면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내부에서 결단한다면 좀 더 수월하게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어 보인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12월6일 국회 청문회에서 “저보다 훌륭한 분이 있으면 언제든 (경영권을) 넘기겠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저보다 우수한 분을 모셔오는 것이 제 일이고, 다 넘기겠다는 것이다”라고 거듭 말했다. “모르는 게 많고 부족한 게 많고 기억력도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는 거 많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넘기는 게 어떠냐”는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김준기 사회부장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