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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녹색세상

안식, 새해의 제언

경향 신문 2019. 1. 4. 15:10

한 해의 마지막 밤 서울, 보신각 주변은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시간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아쉬움과 설렘으로 사람들은 평소와 달리 순간과 순간의 시간에 마음을 쏟는다. 번잡하던 거리는 차분해지고, 주위 사람들도 정겹게 느껴진다.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새로움은 이내 빛이 바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일상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지배한다. 공간은 무언가를 ‘하는’ 곳이다.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어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곳이다.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끌어내고, 더 많은 생산과 소유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공간은 소리 없는 싸움터가 되었다. 시간은 공간을 위해 필요할 뿐, 그 자체의 의미는 사라졌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것으로 소비된다. 언제나 ‘더’를 외치는 우리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다. 이동과 소통수단이 발달할수록 더 모자란다. 아무리 시간을 아껴도 우리는 늘 바쁘다. 아니, 아낄수록 바빠진다.

그러나 시간이 공간보다 더 근원적인 삶의 토대다. 공간은 시간이 허락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잘 모른다. 공간과 달리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은 언제나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는 낯선 시간을 피해 익숙한 공간으로 달아나, 일에 몰입한다. 하지만 시간을 외면하는 한 온전한 평화는 없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앗아갈 마지막 순간을 영영 외면할 순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아도 시간의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공간에서 만든 것은 모두 소멸하지만 시간은 영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안식’은 공간에 가려진 시간의 의미를 밝혀준다(아브라함 헤셸, <안식>). 성서는 하느님이 창조를 모두 마치고 이렛날에 ‘안식’했다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안식은 ‘멈춤’에서 나왔다. 안식은 하느님이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바라보는 멈춤의 시간이다. 안식은 우리에게 공간에서 하던 일을 멈추라고 말한다. 안식으로 들어서면, 우리의 관심은 소유에서 존재로 향한다. 공간 속에는 ‘자기 것’이 있지만, 시간 속에는 ‘자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며 앞만 보며 달려온 자신의 삶을 마주본다.

삶을 관조하는 안식은 경쟁과 효율을 위해 생명과 안전을 내팽개친 세상의 실체를 보여준다.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풍요는 약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착취의 결과다. 태안화력발전소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으로 불거진 ‘죽음의 외주화’ 논란에도 이윤의 극대화에 최적화된 비정규직 제도는 요지부동인 것을 보라. 지역경제 운운하며 아직도 호시탐탐 설악산 케이블카 건설을 노리고, 불과 며칠간의 올림픽 스키경기를 위해 가리왕산의 자연원시림을 밀어버리고는 복원 약속을 번복하는 강원도의 행태를 보라. 안식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착취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통로가 된다. 비윤리적이고 반생태적인 현실을 일깨워주는 안식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동반자이며 세상 만물이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안식은 탐욕의 해독제이며 생태적 회심의 길잡이다. 안식이 축복이자 거룩한 시간인 까닭이다.

새해를 맞아 한 해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생산과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한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욕구의 세상에서 갈등과 분쟁은 불가피하다. 간디의 말대로,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의 탐욕은 충족시킬 수 없다. 아니, 단 한 사람의 탐욕도 충족시킬 수 없다. 탐욕이 아닌 필요의 충족에 만족하려면 안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바쁠수록, 더욱 필요하다. 안식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서도 시간 저편, 영원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더 우리 자신이 되고 세상은 진정 더 풍요롭고 평화롭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프란치스코 교종, <복음의 기쁨>).

<조현철 |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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