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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파도만 홀로 출렁이는 게 아니더라. 산길 들길 억새가 피면 육지에도 억새 파도가 일어 시도 때도 없이 천지가 찰싹거린다. 엊그젠 절정을 놓칠 수 없어 제주도까지 억새 구경을 댕겨 왔다. 솔껭이 불이 잉글잉글허대끼(솔가지에 붙은 불이 이글이글하듯이) 가슴 가득 뜨거워져 지금껏 식지 않고 달궈진 상태 그대로다. 억새 얘기 말고는 그 어떤 말도 하기 싫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만이 억새를 매만지며 가을 정취를 즐길 수 있음이렷다.

억새가 볏과에 속한 풀이란 걸 알고부터는 더욱 억새에 정이 갔다.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기고 가난했던 농부들, 낱알을 이고지고 휘청대는 듯 풍작인 억새밭. 볏가리로 착시되어 맘이라도 배불렀을 거란 짐작을 가져본다. 밭에서 일하던 남정네, 남자의 ‘남’ 자는 밭 전 자에 힘 력 자. 밭에서 힘쓰는 사람이 바로 남자렷다. 억새밭에 첨벙 뛰어들어 힘썼을 그녀와의 사랑, 게서 가졌을 아이들이 바로 나와 당신이라면 믿어지시는가.

 

(경향DB)

“울떡증(갑갑증)이 나가꼬 막가지(막대기) 앞세워 싸아쌀 나와 봤소.” 몸살기운에 드러누워 계셨다는 갑향댁이 지팡이 짚고서 행차하셨다. 억새 보러 저수지둑이나 가자고 데이트 신청을 넣고도 싶었으나 너무 늙고 병든 내 여친. “쪼까만치(조금) 걷기도 숨차요야. 젊어선 산몰랭이(산마루)도 기냥 단박에 올라 댕갰는디….”

‘시골편지’를 잠시 쉬는 사이 마을에 초상도 몇 번 났고 옛집도 허물어졌다. 굉기하게 촘촘한 철망으로 울타리를 친 사장님들이 아래터에 하얀 양옥들을 지어 살러왔는데 서먹하니 남만 같아라. 정치 경제가 암만 전부인 거 같아도 억새가 핀다고, 억새가 진다고 얘기해 주는 그런 친구가 한 명쯤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아프다고 늙는다고, 억새처럼 머리칼이 하얘진다며 걱정하는 그런 새살스러운 목소리가 인간에겐 꼭 필요해. 민중들 억새밭에서 정을 나누며 ‘불을 내고 일을 내야’ 세상은 바뀌게 될 터…. 일단은 가을 다 가기 전 억새밭에서 한번 만나자꾸나. 여우꼬리 억새가 춤을 추는데 우리도 만정을 나눠봐야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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