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해 전 오늘, 당신은 유엔 여성 친선대사의 자격으로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감동적 연설을 함으로써 페미니즘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당신의 그 연설은 HeForShe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며 인류의 반을, 당신과 다른 성을 지닌 이들을 페미니즘 운동의 활동가로 불러냈습니다. HeForShe 캠페인의 주체는 물론 ‘유엔 성평등과 여성권한 기구(UN Woman)’지만, 이 캠페인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또렷이 당신입니다.

당신은 그 연설을 통해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진 그레인저에서 여성운동가 에마 왓슨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젊은 당신에게 남은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은 길겠지만, 그 긴 생애를 당신은 또한 여성운동가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멋진 연설에서 남성을 페미니즘 운동가로 초대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즉각 당신의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의 초대에 응한 남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신은 연설에서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한 뒤, 그것이 남성 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또 당신은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한 뒤, 그 말이 남성 우위 사회에서 얼마나 불리한 자기규정인지 깨달았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은 유복한 성장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지적했듯, 인류의 반을 제쳐놓은 운동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운동이자 남성을 위한 운동이기도 합니다. 당신 말마따나, 남성 우위 사회에서 남성은 강인함과 공격성을 강요받습니다. 당신은 영국을 예로 들었지만,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자살일 것입니다. 남성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남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 심리적으로 제약되기 때문입니다. 강인하지 않은 것은 덜 남성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했듯, 남성이 남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공격적이 될 필요가 없다면, 여성 역시 여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복종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남성이 통제할 필요가 없다면, 여성 역시 통제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유롭게 감성적이 돼야 하고 자유롭게 강인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HeForShe 캠페인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지적했듯, 평등에 대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의도하지 않은 페미니스트(inadvertent feminists)’입니다. 나 역시 당신이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페미니스트’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미 마음으로 당신의 초대에 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나름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페미니즘’에 속할 조그만 실천들을 해왔습니다. 당신이 인용한 에드먼드 버크의 말대로 “악의 힘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한 사람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선함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연설에서 똑같은 노동에 대해 여성과 남성이 받는 차별적 임금, 일부 뒤진 지역 여성들의 조혼(早婚)과 교육 기회 박탈 등을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성차별의 핵심적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 멋진 연설에서 누락했을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은 양상이 크게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LGBT라 불리는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차별은 이성애자 여성이 겪는 차별과 크게 다릅니다. 또 상층계급에 속한 여성과 하층계급에 속한 여성이 겪는 성차별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페미니즘 운동이 온전해지려면 인종적 소수자들에게, 성적 소수자들에게, 그리고 계급적 약자들에게 항상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거기에 장애인 여성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논점들에 눈을 감음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을 고립시켰습니다.

둘째는 당신도 알고 있을 저명한 페미니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말한 ‘순진한 페미니즘’의 위험입니다. 에런라이크가 ‘순진한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화에 따른 것이든 생물학적 바탕을 지닌 것이든 여성이 남성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가정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해가 모든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보는 페미니즘입니다.

에런라이크는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인 포로들이 당한 끔찍한 고문의 미국인 수행자 가운데 여자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걸 알고는 가슴이 비통함으로 찢어졌다고 털어놓습니다. 당신이 열 살 갓 넘었을 때 일어난 일이어서 당신은 그 일을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전 세계 언론에 실린 그 유명한 사진에서, 린디 잉글랜드라는 미군 여성 일병은, 벌거벗긴 채 머리에 두건이 씌워진 이라크 남자들의 목에 줄을 묶어 개처럼 끌고 다니며 웃는 얼굴로 포로들의 성기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본 에런라이크는 충격을 받고 ‘자궁이 양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윤리적 우월성이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페미니즘이 순진할 뿐만 아니라 태만하고 자기만족적이라고 지적합니다. 그것이 자기만족적인 것은 여성의 승리를 그 자체로서 모든 사람의 승리로 가정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태만한 것은 싸워야 할 다른 대상이 많이 있는데도 오직 성평등을 위한 투쟁 하나만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에런라이크의 이런 지적은 내가 앞에서 거론했듯, 페미니스트들이 인종차별주의, 계급적 박해, 성소수자 박해, 장애인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은 HeForShe 캠페인의 첫발을 내디디면서 인류의 반인 남성을 페미니즘 운동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인 그 남성들이 동질적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아는 사실입니다. 성적 범주 안에서는 그들이 대개 가해자이기 쉽지만, 한 사람의 존재는 성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중층적으로 결정됩니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결정된 존재는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페미니즘은 그런 사실에 섬세한 눈길을 건네야 합니다.

HeForShe라는 구호에는 인류가 성적으로만 구분된다는 함의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입니다.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에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지난해에 노벨평화상을 탄 파키스탄의 여성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당신보다 일곱 살이 젊지만, 당신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허마이어니는 강인하고 박식하고 총명합니다. 남자 동급생들보다 뛰어납니다. <해리 포터>의 원작자 조앤 롤링 여사도 허마이어니 진 그레인저의 캐릭터에는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말랄라의 페미니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의 소산입니다. 당신이 연설에서 술회한, 당신 성장기의 ‘여성스럽지 않음’에 사람들이 별난 눈길을 보낸 것과는 그 경험의 질이 다릅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과 말랄라를 비교해 말랄라의 페미니즘이 더 온전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랄라 역시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탄 국제적 명사입니다. 당신이든 말랄라든, 이미 국제적 명사가 돼버린 여성에게는 사실 페미니즘의 필요성이 그리 절실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젊은 유명인이, 페미니즘이 특별히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유명인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고 인류의 반을 페미니즘 운동에 초대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당신의 HeForShe 캠페인에 인류의 반 모두가 참가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사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연설에서 지적했듯, 여성과 남성이 평등을 누리고 있는 나라는 이 행성에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 연설의 마지막 대목은 모든 사람에게 실천을 독려하는 최고의 마무리였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류입니다. 남성과 LGBT를 포함한 모든 인류입니다. 인종과 계급과 장애 여부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류입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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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