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포스터 2가지를 내놓았다. 형사로 분한 송강호·김상경의 얼굴 뒤로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묻는 컬러판과 ‘1986년 시골마을, 두 형사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고 적은 흑백판이다. 10차례의 화성 연쇄살인을 그린 두 포스터의 글귀는 33년 만에 답을 찾았다. 컬러판의 ‘당신’은 처제 성폭행·살인범으로 25년째 부산교도소에 있는 56세 남자 무기수로 지목됐다. 흑백판의 잔뜩 화난 두 형사가 쥔 유력한 단서는 5·7·9차 사건 용의자의 DNA였다. 연인원 205만명이 범행 현장을 뒤지고 4만116명의 지문을 대조했어도 허탕만 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과학수사의 열매였다. 

86년 9월 15일 1차 사건 발생 이후 91년 4월까지 10차례 살인사건 발생. 단서없이 미궁에 빠진 수사본부는 10년 만에 해체 경찰이 1987년 1월10일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5번째 희생자 홍모양(당시 18세)이 발견된 황계리 논바닥 범행 현장(왼쪽)을 살펴보고 있다. 1988년 12월 조종석 당시 치안본부장(가운데)이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를 찾아 취재진에 수사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0번째 희생자 권모씨(당시 69세)가 1991년 4월3일 발견된 동탄면 야산에서 경찰이 현장검증(오른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경향신문 자료사진

사건이 일어난 화성의 논밭·야산에서는 정액 묻은 피해자 속옷들과 머리카락 6가닥, 담배꽁초, 우유팩 등이 수거됐다. 가로등 몇 개 켜진 시골마을엔 폐쇄회로(CC)TV도 없어, 경찰은 20대 중반 스포츠머리 몽타주를 들고 매복하며 범인을 쫓았다. ‘비오는 수요일 빨간 옷 조심’이라는 괴소문이 돌고, 유전자 수사는 낯설어 일본에 부탁할 때였다. 휴대폰과 CCTV로 범인의 위치·단서를 실시간 추적하는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유전자 수사는 이제 가·피해자의 생활습관·질병까지 찾아내고, 어느 바다에 사는 장어인지 가리고, ‘디지털 증거’도 쏟아내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집 문설주의 곰팡이, 컴퓨터 마우스에서 채집된 박테리아, 신발 밑창에 묻은 꽃가루로 범죄 단서를 추적하는 수사 기법들이 공유되고 있다. 화성 사건 용의자 지목도 발전한 과학수사, 2006년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도 유전자 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수사팀이 부단히 국과수를 찾은 집념의 합작품인 셈이다.

CCTV가 거리에 깔린 후 은행강도가 없어졌다. 도망가고 숨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수사가 악행을 막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응징의 시작이다.” 봉 감독이 16년 전 살인 영화 제목에 ‘추억’을 넣으며 한 말이다. 집념처럼 기억하고 과거엔 몰랐던 과학수사로 응징할 미제사건은 아직 널려 있다. 살인의 추억도 지목된 용의자가 범행을 부인하며 ‘시즌2’가 시작됐다. 더 많은 과학적 단서가 그를 옥죄고 무너뜨릴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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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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