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진 DJ’의 얼굴이 선연하다. 1996년 총선 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단독 영수회담한 날이다. 브리핑하던 DJ는 요체만 말한 뒤 당사 지하 복집에 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했다. “칼국수 내놨는데 그것도 대통령 말 듣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YS는 소식가, DJ는 대식가였다. ‘십중팔구는 영수회담의 주도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할 때 떠올리는 컷이다.

영수(領袖). 정치조직 우두머리를 뜻하는 이 말은 오래전부터 대통령과 야당대표 회담에 붙여졌다. 한자가 다르지만, 여당 총재인 대통령(領)과 당수(黨首)의 끝말을 합쳤다고 풀기도 했다. 회담은 화전(和戰)의 고빗길이거나 국가 의제를 놓고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1990년 3월 DJ와 노태우 대통령 회동이 대표적이다. 대통령 공약인 ‘중간평가’를 하지 않고, DJ는 5공 청산과 광주시민 명예회복, 지방자치제를 손에 쥐었다. 1997년 대선 전 외환위기 화두로 만나 ‘대선 공정관리’와 ‘퇴임 후 안정’을 담판한 DJ-YS 회동도 정치적 갈림길에 만났다.

영수회담의 또 다른 얼굴은 ‘밀담’이다. 대통령과의 비공개 대화로 ‘야권 원톱’을 인정받던 시절엔 더 그랬다. 1975년 박정희-YS 회동은 ‘싸꾸라’ 시비도 일었다. “자네도 대통령 한번 해야지”라고 했다는 뒷말이 나오고, YS도 독대 후 부드러워지면서다. 2시간30분이나 만난 2005년 노무현-박근혜(한나라당 대표) 회동엔 ‘대연정’이 돌출했다. 탄핵설이 불거지던 2016년 11월 민주당 의총에서 거부된 박근혜-추미애(대표) 회동도 물음표가 달려 있다. 늘 여당 대표와 함께 만나던 박 대통령이 먼저 단독회담을 급제안한 이유가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3일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민생부터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전날 영수회담 제안 뒤 청와대에서 “구체적 내용을 물어왔다”면서다. 그는 “이 정권의 소득·성장·분배·고용 모두 KO패”라고 했다. ‘심야토론’ 논전을 원하는 걸까. 정가에선 ‘여·야·정협의체’는 줄곧 걷어차면서 정치적으로 힘든 고비마다 단독 영수회담을 요구하는 ‘저의’도 도마에 오른다. 민생 대화는 누구나 반기지만, 야권 내 ‘영수’ 위상과 밀담을 꾀하는가 싶어서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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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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