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

조선 수도 한양의 4대문이 모두 정위치에 ‘복원’됐다.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멸실된 정서쪽 돈의문(敦義門)이 20일 정동사거리 터에서 ‘디지털 개문식’을 열었다.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세상에 세워진 돈의문은 놀랍도록 옛 모습 그대로다. 실존하는 흥인지문(동)·숭례문(남)·숙정문(북)과 함께 서울 정도 후 4대문 이름에 담았던 ‘인의예지’ 뜻도 114년 만에 빈자리가 메워졌다.

돈의문은 유독 터잡기에 시간이 걸렸다. 태조 5년(1396년) 사직동 고개에 들어섰다가 태종 13년(1413년) 풍수상 시비로 경희궁 서쪽 언덕으로 옮겨 서전문으로 불렸다. 세종 4년(1422년)엔 그 자리가 통행하기 험해 현재의 남쪽 마루터로 옮겼다. 돈의문이 ‘새문’ ‘신문’으로 불리고, 그 안쪽에 신문로·새문안길이 생긴 것도 세 왕을 지나 늦게 자리잡은 까닭이었다.

증강현실로 복원된 돈의문. 서울 중구 정동사거리에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돈의문 AR’을 실행하거나 돈의문박물관 앞 키오스크를 이용해 감상할 수 있다. 서울시 제공

돈의문은 중국 사신과 개성·마포나루터 상인들이 드나든 ‘교역의 문’이었다. 성문 밖에는 중국 사신을 맞은 모화문과 경기감영이 위치했다. 일제가 1915년 도로를 넓히며 허물 때도 돈의문은 서울의 첫 노면전차(서대문~청량리) 출발지였다. 당시 헐린 목재는 경매 끝 205원50전에 낙찰됐다고 한다. 풍파도 많았다. 임진왜란 중 문루가 불탔고, 인조반정 후 이괄이 도성을 침공했던 문이고,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파루종이 울리자 들이닥친 문이었다. ‘의(義)’자를 이름에 새기고도 왜적·반란·낭인들을 지켜봤고, 일제가 없애버린 그 문은 1세기 뒤 4차산업혁명 속에 온전히 ‘재건’됐다.

복원은 험로였다. 10년 전 서대문고가차도 철거 후 원형 복원 계획을 내놨던 서울시의 선택은 디지털이었다. 교통·보상 문제로 실제로 짓지 못하고 민관이 함께 우회로를 잡은 것이다. 아쉬움과 달리, 전문가들의 지혜와 땀이 밴 AR앱과 돈의문박물관에서 VR기계로 직접 본 가상세계는 ‘문화재 지평’을 새로 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 4차례 조도를 달리한 성벽·홍예문·단청 고증이 깔끔하고, 숙종 때 현판을 쓴 유학자의 한문 필체를 분석해 만든 한글 현판이 신선하며, 문루에선 한양의 야경이 보인다. 5G 시대 디지털 문화재는 막힘없고, 창의적이다. 전국으로 뻗어나갈 그 출발점에 돈의문이 세워졌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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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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