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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Asian Hate”(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를 멈추라)는 구호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지난 3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근교 살해사건으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이 주목을 받으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 미국 백인의 인종차별은 흑과 황을 분간하지 않으니까요. 중국계 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이 1882년, 아시아계 특히 일본 이민을 막는 ‘이민법’이 1924년에 통과됐습니다. 2차 대전은 그 인종적 차별을 노골화했죠. 독일과의 전투에서 볼 수 없던 인종적 조롱이 태평양전에서는 당연시됐습니다.

물론 미국은 달라졌습니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흑인 인권운동의 성공은 인종 차별의 제도적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아시아계의 눈부신 사회적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바마가 첫 흑인 대통령이 되면서 포스트인종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마저 나왔죠.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평가가 얼마나 성급하고 무모했는지 보여줬습니다.

미국의 진보는 백인들의 문명적 불안감을 오히려 증폭시켰고, 트럼프는 이를 정치적으로 감히, 적절히 이용했습니다.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실패를 해도 40%의 철벽 지지율을 유지했죠. 백인의 분노가 정치적 자산이었으니 인종적 증오의 불장난을 이어갔습니다. 국정운영이 힘들어질수록 그 불의 크기도 커졌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그 절정이었죠. 시민 수십만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총체적 실패가 드러났고 트럼프는 중국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트럼프 지지층은 중국, 중국계 시민,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으로 그 혐오의 폭을 넓혔습니다. 혐오가 욕설과 폭력으로 자연스레 이어졌죠. 여기서 우리는 인종적 편견, 여기서 파생하는 인종 차별이 정치적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는 혐오의 대상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위험함을 똑똑히 봤습니다.

인종적 혐오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시아인의 인종적 증오도 상당하니까요. 이민자 삶이 힘든 만큼 이민자들은 동향끼리 돕습니다. 한국 이민자는 한국계 사업체에서 일하며 사업도 배우고, 이민 삶의 요령도 터득하죠. 한국계가 많이 하는 소매업은 비즈니스 성격상 현금을 많이 쓰고 작은 소비가 잦은, (흑인)소비자가 많은 동네를 파고듭니다.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이다 보니 영어가 모자라는 경우가 많죠. 미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흑인)손님과 마찰도 일어나죠. 이런 경험은 흑인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전환됩니다. 여기에 여러 가치평가를 더하면서 혐오로 변질하고 가족, 동료, 이웃 한인에게로 퍼집니다. 한인은 인종차별의 대상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죠. 이런 이중성은 인종갈등을 부추기고 구조화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흑한 갈등은 인종 최상위층의 지배를 강화하니까요.

미국 한인만의 문제도 아니죠. 비유럽계 이주자에 대한 가혹한 학대와 잔인한 멸시는 한국 땅에서도 흔히 봅니다. 폭행, 성폭력, 노동 착취 등 형태도 다양하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 무관심을 대응의 기본값으로 설정한 상태입니다. 경제적 이유로 우리 모두 학대와 멸시에 동참하는 셈이죠. 하지만 우리의 인종적 혐오 또한 백인을 정점으로 하는 인종 피라미드의 일부는 아닐까요.

“Stop Asian Hate”는 “아시아인의 혐오를 멈추라”라고도 읽힐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의 이중성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말해주고 있던 셈이죠. 그러니 아시아인의 혐오를 멈추지 않은 채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도 멈출 수는 없는 겁니다. 피해자로서의 목청이 높아지는 만큼 가해자의 반성도 절실합니다. 인종차별발 정치적 문제로 우리 모두 공멸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내 안의 인종차별, 혐오, 무관심을 씻어내야 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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