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 채 되기 전에 TV에서 본 개그 프로그램의 콩트가 아직도 기억난다. 아니, “기억난다”기보다는 “잊혀지지 않는다”에 가까울 것 같다. 내용은 이랬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한 마을의 돈 많기로 유명한 부잣집의 딸내미가 덩치가 크고 못나기가 그지없는데, 그게 또 외동인지라 오냐오냐 자라 버릇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니 혼기가 차도록 데려가겠다는 남자 하나가 나서지를 않아 부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석꾼은 누구든 딸을 데려가기만 하면 큰돈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한다. 이에 가난하지만 영민한 총각이 찾아와 그 천방지축을 기꺼이 아내로 맞는다.

이 정도였다면 아직까지 잊히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혼기가 찬 딸을 치워버리려는 부모들의 이야기’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린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그래서 실제로는 겁먹게 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청년이 말괄량이 뚱보를 신부로 맞아들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친구들이 그를 놀려먹기 위해 신혼집으로 찾아온다. 기도 못 펴고 살고 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면서 낄낄거린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신혼집에서 마주친 새신부가 어찌나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는지, 놀랄 노자다. 심지어 행실이 고아지니 추하기 그지없던 얼굴도 어딘가 고와 보인다.

친구들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새신랑에게 묻는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 새신랑은 빙글빙글 웃으며 답한다. “첫날밤에 술을 진탕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이불에 물을 엎어버렸지.” 신혼 첫날에 이불에 오줌을 지린 줄 안 신부는 부끄러움에 바들바들 떨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다고 설치는 신랑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평생 하늘처럼 받들며 순종하겠어요.”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뚱뚱하고 거침없는 여자아이였던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세계에서 여자의 활기는 부덕이 되고, 남자의 야료는 재기(才氣)가 된다는 것을.

과거에는 이런 종류의 민담이 각종 판본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판본에서는 “박색인 주제에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것까지는 참았는데, 여성 상위 체위(woman on top)로 하늘 같은 남편을 짓누르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친구를 시켜 아내를 유혹하게 한 뒤 불륜 현장을 덮쳐 몽둥이로 두들겨 버릇을 고쳤다고 자랑한다.

배우 라미란과 이성경이 출연한 영화 <걸캅스>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뭐가 되었든 ‘제멋대로인 여자’를 길들이는 이야기에서 여자들은 뚱뚱하고, 시끄럽고, 많이 먹고, 욕심 사납고, 음탕하며, 움직임이 크다. ‘여성 상위 체위’가 상징하는 것처럼 허락되지 않은 자리로 기어 올라가 남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

이 여자들은 성적 위계를 뒤집기 때문에 무질서를 초래하고, 스스로 중성성을 드러내면서 사회의 젠더 이분법을 비웃는다. 절제와 순종의 미덕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않으며, 걸걸한 입담을 자랑하고 스스로 농담이 된다. 자유롭게 나이 들었기 때문에 때때로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지혜를 지녔다. 그들은 좁은 공간을 깨고 자신을 기꺼이 확장시킨다. 큰 몸, 큰 입, 큰 목소리, 큰 성기는 그 확장성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미 위협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여자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들을 ‘길들이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상상한다. 그렇게 그들을 낄낄거림의 소재로 격하시킴으로써 힘을 빼앗아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나는 그 콩트에서 사지를 흔들며 무대를 활보하던 ‘위풍당당한 못난이’가 남편의 거짓말에 속아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종종 거리며 걷는 ‘온순한 새신부’가 되었을 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좁아졌는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 건 <걸캅스> 때문이었다. 이 영화 속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은 타협과 도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스스로 농담이 된다. 그리고 웃음이 쌓여갈 수록 그들이 활보하는 공간은 넓어지고,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게감을 더해간다. 그야말로 ‘우먼 온 톱’의 활개 덕분에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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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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