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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남북 대화가 끊긴 이후 문재인 정부 핵심 관계자들은 ‘비핵화’를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2018년 4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 남북공동선언에서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와 함께 등장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나 외교안보 관계자들이 비핵화를 언급하는 빈도는 차츰 줄어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최우선 과제가 된 남북대화 복원을 위해 북한에 민감한 주제인 비핵화를 강조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최근 미국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에서 ‘핵폐기’ 대신 ‘평화’를 넣어 CVIP라는 신조어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국책연구기관 소속 연구자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핵화 우선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은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지난 4일 통일연구원 주최 ‘한반도형 협력안보와 평화프로세스’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남북 적대관계를 해소하려면 비핵화 우선 정책을 지양하고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신뢰의 틀을 만들어 북한의 핵을 비핵이 아닌 ‘불용(不用)의 핵’으로 만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소개했다.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으로 평화공존 관계를 지향하는 ‘한반도형 협력안보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발표 내용을 꼼꼼히 읽어봐도 ‘인식의 전환’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한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직 체계적으로 완성된 논리가 아닌 ‘공론화의 시작 단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부정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국책연구소의 학술회의에서 소속 연구자들이 이 같은 주장을 한 것을 ‘학자로서의 개인적 견해’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지난달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 협력이야말로 핵이나 군사력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안보정책”이라고 강조하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 제안을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기 때문이다. 한·미의 기본 접근법은 ‘비핵화 우선론’이 아니다. 완전한 북핵폐기가 확인되어야 제재를 풀 수 있다는 접근법은 네오콘들이나 주장할 법한 방식인데 지금 이런 접근법을 주장하는 정책당국자는 없다. 비핵화의 최종단계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를 위해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핵활동을 중단해야 하며, 이 같은 합의가 이뤄지면 비핵화 진행에 맞춰 제재를 완화하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동시병행적 이행을 한다는 것이 한·미의 기본 접근법이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목표와 원칙을 바꿀 수는 없다. 남북 간 교류협력이 비핵화 진전에 장애가 될 정도로 앞서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는 것은 국제적 의무다. 한국이 혼자 힘으로 좌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비핵화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확고하게 지향하고 있는 최종목표다. 중국·러시아도 ‘북핵 불용(不容)’이 원칙이다.  

미·중 주도의 국제질서에서 ‘한반도형 협력안보’를 구축한다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한국은 미·중 구도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의 외교전략은 그 구도 안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지 구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설사 새로운 한반도 협력 모델 구축을 시도한다고 해도 인식의 전환과 변화가 필요한 쪽은 남측이 아니라 철저히 냉전적 사고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일 것이다.

비핵화는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북한의 핵능력이 너무 고도화됐기 때문이다. 북핵 당사국들이 그동안 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결과라는 의미도 된다. 그래도 비핵화가 한반도 평화에 기본적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비핵화가 어려워졌다고 장애물 피하듯 먼저 관계를 진전시키고 그 결과로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핵보유에 아무런 불편도 국제사회의 문제제기도 없다면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핵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남북관계도, 평화공존도 유지될 수 없다. 비핵화가 평화에 방해가 된다면 그 평화는 도대체 어떤 평화인가. 그렇게 유지되는 평화는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간절히 추구했던 평화가 아닐 것이다. 일시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비핵화를 우회해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낙타는 이미 텐트 안에 들어 와 있다. 못 본 척 외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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