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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마흔을 칠 때 처음 지리산에 올랐다. 이틀간 산장에서 밥도 먹고 밤도 건너야 했기에 준비물이 상당했다. 취사도구, 쌀, 밑반찬과 더불어 소주와 돼지고기. 우연히 <지리산 유람록>을 들추다가 옛 선비들의 행장을 보았다. 짐꾼이나 하인의 수발에 의지했겠지만 지필묵은 꼭 챙기는 물목이었다. 이후 가파른 나이를 먹어가면서 산의 경사를 받아들이고 나름 즐기는 생활을 꾸려나간다. 산에서 걷고 먹는 것에 더해 보는 것에도 유의하려니 단출한 차림이다. 배낭이 퍽 가뿐해졌다. 근래에는 산에 갈 때 세 권의 고전과 동행한다.

<중용>. 도무지 모르겠는 그 난해한 내용 중에서 우선 대강의 뜻을 하나 붙잡는다. 중용이 말하는 성(誠)의 개념을 가지고 보면 산이 조금 달리 보인다. 반짝이는 꽃, 일획의 나무, 분주한 곤충. 이들의 어울린 행진을 보면 참으로 성실한,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한 지극한 원리를 어렴풋이 이해하겠다는 궁리가 감히 드는 것이다.

그리고 <종의 기원>. 진화론은 이 자연계가 어쩌면 이리도 다종다양(多種多樣)하게 구성되어 유지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최근 새롭게 완역된 이 책에서 다윈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고대 중국 백과사전에서 선택의 원리를 분명하게 발견했다.”(<종의 기원 톺아보기>, 54쪽, 신현철 옮김) 다윈이 검토한 이 백과사전에 <중용>이 포함되지 않을 리는 없지 않을까. 한 톨 남김없이 최선을 다한다면 이런 생태계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삼국유사>. 며칠 전 그 어떤 낭패를 만나 오갈 데 없는 마음 끝에 퍼뜩 이 책을 집어들었다. 옛날 자유교양경시대회에서 만난 이래 그때 읽은 깜냥으로 다 안다고 치부해온 책이었다. 더듬더듬 더러 한문도 확인하면서 읽어나가자니 우리 국토의 높이, 깊이, 넓이가 서너 배로 확장되는 느낌이 진실로 들었다. 내 남은 시간 동안 기울여야 할 심혈이 삼국유사의 저 산속으로 콸콸콸 흘러갔으면! 그리하여 사복(蛇福)이 땅을 열어 어머니의 시신을 업고 들어간 길이 바로 여기인가 싶어 어느 돌 틈 옆 띠(茅)의 무릎 아래를 어루만져 본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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