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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주위에 도랑을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비워 대비하면(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됩니다.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려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틈에 공격하면 이깁니다.”


서기 172년 11월(신대왕 8년), 한나라가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국상 명림답부의 주장대로 ‘청야(淸野)’의 전법으로 맞서자 과연 한나라 군사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병으로 철수하는 적군을 좌원(坐原)에서 몰살시킨다. 이것이 ‘좌원대첩’이다. 612년과 645년, 각각 수 양제와 당 태종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그때마다 수와 당의 충신들이 한결같이 간언한다.  


“요동의 길은 멀고 식량을 수송하기 어렵습니다. 원정의 핵심은 신속한 행동입니다. 지체하면 집니다. 제발 고구려의 항복작전에 속지 마소서.”


 



그 말이 맞았다. 수의 113만 대군은 고구려의 청야술과 을지문덕의 교묘한 거짓 항복전술에 녹아난다. 을지문덕은 굶주림에 지쳐 철수하는 수군을 살수에서 몰살시켰다. 당 태종이 침공했을 때도 안시성의 군·관·민은 전투를 겨울까지 끌고가는 투혼을 발휘한다. 당 태종은 “요동의 풀이 마르고 물이 얼었고, 마침 양식도 떨어지기 시작했다”(<삼국사기> ‘보장왕조’)며 철군을 결정한다.(사진은 고구려 백암성) 


1951년 6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은 77만명에 달했다. 그 해 8월 미군은 ‘교살작전’을 펼친다. 신안주-개천-서포를 잇는 ‘삼각지대’를 융단폭격, ‘보급로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보급로가 끊긴 중국군은 들판의 야채로 허기를 달랜다. 중국은 ‘보급로 복구’에 사활을 건다. 미 공군조차도 “중국 복구부대가 포탄 구멍을 복구하는 속도는 F86전투기의 폭격 속도와 필적할 만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예컨대 1952년 3월25~26일 470여대의 전투·전폭기로 파괴한 정주~신안주 철로는 6일 만에 복구됐다. 폭파된 철도가 24시간 만에 복구된 모습이 확인되기도 했다. 우리 측 전사인 <한국전쟁(하)>도 “미군의 보급로 폭격은 적의 보급량을 제한하고 보급 속도를 줄였을 뿐 전쟁 자체를 종결시키는 결정적인 수단은 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다만 “차단작전은 적의 전투능력을 약화시킨 주요인이 됐다”며 ‘절반의 성공’을 거뒀음을 알리고 있다. 보급로를 둘러싼 ‘전쟁 안의 전쟁’은 이렇게 무승부로 끝났다. 그랬으니 전쟁 자체도 승패 없이 마무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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