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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비평

[이대근 칼럼]아, 상하이

경향 신문 2019. 3. 27. 10:58
오늘, 문득 상하이를 생각한다. 세상 온갖 이야기가 굽이굽이 펼쳐지는, 서사의 깊은 골짜기이자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그래서 하나의 장르가 된 1920~1930년대의 올드 상하이. 이를 새삼 떠올리는 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내달 11일로 다가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상하이는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는 올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미술작품·영화·소설·논픽션의 홍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의 시선은 왜 이렇게 자주 제국주의 열강이 대륙을 할퀴던 반(半)식민지 시대로 향하는 걸까? 

“집집마다 마작 판 두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한 듯 상해의 밤은 깊어가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한 혁명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고려) 망명객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의 산데리아(샹들리에)만 눈물에 젖네.(심훈, ‘상해의 밤’)” 우리에게 익숙한 상하이의 삶은 조국을 잃은 망명객의 그것이다. 하지만 상하이로 간 조선인이 모두 독립운동가, 혁명가였던 것은 아니다. 공부하러,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혹은 새 삶을 찾으러 간 이도 많았다. “(헨리)포-드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황제’라 불린, 중국인의 우상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영화배우 김염이 있었는가 하면, “국적도 없이 허줄구레한 모습으로 국제도시 뒷골목을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다니는 집시” 같은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식민지 억압, 봉건적 관습이 없었다. 대신 자유의 향기가 넘쳤다. 결혼과 연애의 자유, 자기 삶을 결정할 자유. 당시 열강의 조계지였던 상하이는 58개국의 이민자가 섞여 살던 세계 5대 도시로 세계의 축도였다.

 

“엉댕이 내두르는 불란서 여자, 졈잔을 빼는 영국 아해들, 생글생글 웃는 혼혈아들, 사람을 녹이게 아름다운 포도아(포르투갈) 여자, 장화 신은 아라사(러시아) 노동자, 내복 저구리만 닙은 인도 문직이꾼들, 니빨 색캄한 안남(베트남)인의 떼, 턱석뿌리 유태 녕감이 가지각색의 발언을 주절거리면 공원 안이 떠들썩해진다.”(<개벽> 1923년 8월) 당대 지구상의 온갖 이념과 사상도 흘러 들어와 백가쟁명했다. 이러한 상하이의 개방성, 문화적 포용성은 전 세계를 끌어안고도 남을 만했다. 

어떤 조선인에게는 이런 상하이가 “부박한 딴스, 아메리카 에로 영화에 홀니는 갑산(값싼) 염가의 눈물”로 치부됐다. 그 또한 상하이였다. 거리는 도박, 아편, 매음이 난무했다. 음모와 테러, 간첩과 사기꾼이 활개 쳤다. 1933년 중국 전 공업생산량의 50%를 차지할 만큼 풍요로웠고, 아내에게 밀매음을 강요해 살아가야 할 만큼 적빈했다. 낮은 평화의 거리였고, 밤은 청방·홍방 두 조폭의 무대였다. 근대 문명의 공간이자 근대적 모순의 도시였고, 동양의 파리이자 아시아의 매춘부였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닌, 이 모든 것이 상하이였다. 상하이에서는 문명과 야만, 자유와 억압, 선의와 악의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얼굴을 했다. 상하이는 모든 것을 품었으면서도 그걸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분명했다. 총 한 방으로 누군가를 쏘아 쓰러뜨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다. 혁명이 가능했고, 그걸 정당화할 이념도 있었다. 전체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자유주의가 똑같은 자격으로 잠재적 미래를 두고 경쟁했다. 

2019년 3월27일 오늘 총 한 방으로 쓰러뜨릴 대상이 있는지 불분명하다. 우리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의 문제가 있다. 지구를 덮친 불평등, 양극화, 청년 실업, 이주자 문제, 극우 포퓰리즘. 21세기 민주주의가 낳은 모순이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대안이 없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모순조차 정당화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넘는 진보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지 벌써 사반세기가 넘었다. 지구는 하나의 제도, 하나의 질서로 통일되었다. 우리는 일종의 전 지구적 유일체제, 결정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문제 인식이 날카롭게 벼려지지도 않고, 변화의 열정이 타오르지도 않으며, 변화의 수단을 찾기도 어렵다. 그와 달리 모든 문제·모순이 응집된 상하이는 하나의 씨앗처럼 다양한 가능성을 그 안에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닫힌 세계, 올드 상하이는 열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상이, 따분하게도 어제의 반복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분출할 때의 격정과 흥분, 서로 부딪치며 깨질 때의 절망, 그로부터 피어나는 희망을, 거세된 세상은 결코 알 수 없다. 지루해진 오늘, 상하이를 생각한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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