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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이대근 칼럼]타협 제대로 하기

경향 신문 2018. 7. 25. 15:08

적폐청산은 선악의 문제였다. 대통령이 선을 선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었고, 정당성은 즉각 힘을 발생시켜 문제 해결에 작용했다. 민생문제는 다르다.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선의는 자영업자에게는 악의로 받아들여진다. 이익과 이익이 충돌하는 생존 경쟁의 장에서 선악의 구분선은 희미하다.

물론 민생문제에도 적폐와 같은 공동의 적이 있다. 경제 기득권이다. 하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다. 불패의 신화를 자랑한다. 가난한 자들끼리 생존 경쟁에 내몰려도 그 원인을 제공한 경제 기득권은 미동이 없다. 적폐 청산에 선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민생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개혁의 주체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과거 청산을 위해 하나로 뭉쳤던 세력이, 지방선거 이후 세상의 관심이 삶의 문제로 옮겨가자 봉인되었던 차이를 드러내며 분열하고 있다.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자기 관점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한다. 지지층 사이에서도 불만이 고개를 든다. 최저임금 인상에 저소득층과 노동계, 영세자영업자가 다른 이유로 비판적이다. 침묵하던 진보적 지식인은 사회경제 개혁 후퇴를 경고했다. 무기력했던 보수세력도 목소리를 낸다. 정부를 공격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던 보수당이었다. 그런데 민생을 명분으로 대정부 공세를 하자 쑥쑥 먹혀들어가는 느낌이다. 시간이 갈수록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오르고, 정부·여당 지지율은 그보다 큰 폭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보수야당은 수세에서 공세로, 여권은 공세에서 수세로 입지가 바뀌었다. 그 사이 정부는 책임을 묻는 자에서 책임을 지는 자로, 문제 제기 자에서 문제 당사자가 되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정부는 이젠 고립무원의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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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가 지배하는 사회 경제 현실에서 특정 정책을 고립적으로 추진하면 을들의 생존 게임, 즉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처하기 쉽다. 각자 최선을 추구한 행위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나쁜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서로 연계된 정책의 집합이 필요하다. 그래야 특정 정책이 개별 집단에 불리하게 작용해도 다른 정책으로 상쇄할 수 있다. 게다가 사회경제 개혁의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고 단기적 효과는 엇갈리기 쉽다. 단기간 불이익을 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이익을 보는 이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불만세력이 될 수 있다. 이 엄중한 현실을 무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일 인도에서 이재용 삼성 회장을 만나 “한국에서도 더 투자해 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사회경제 구조를 바꾸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이 없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의도와 상관없이 나쁜 시나리오를 미리 보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준다. 개혁에 실패하고 재벌에 의탁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역전극 말이다. 대결정치는 개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 있는 차이와 갈등을 증폭시킨다. 집권세력의 실패는 야당의 성공이 되고, 집권세력의 성공은 야당의 실패가 되는 화해불가능성을 강화한다.

이런 조건에서 여러 계층의 이해가 걸린 사회경제 현실을 개혁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야 모두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공약했다. 그러나 보수야당은 올라가는 최저임금을 떨어뜨리는 저격수로 변했다. 정책 성공에 따른 정치적 자산을 정부·여당이 독점하면 보수야당이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상대의 득점이 나의 실점이 되도록 짜인 기존 판을 뒤집는 것. 야당도 불리하지만, 여당도 불안한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협력 정치를 해야 한다. 여권은 비판 여론과 야당 공세에 밀려 일부 정책을 양보했지만, 협치는 아니다. 궁여지책이다. 그게 여야 간 일정한 정책 협약 아래 이루어진 절충이라면 대화를 촉진해야 했다. 그러나 대결정치가 낳은 임기응변적, 수세적 대응이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사회세력 간, 정당 간 대타협을 촉진하는 공동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개혁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 개혁에 따른 차이와 갈등을 흡수할 수 있다. 개혁이 사회적, 정치적 분열로 표류하거나 정부 지지율 등락에 따라 흔들리는 일을 피할 수 있다면 왜 이런 일을 마다하는가? 마침 청와대가 연정론을 제기한 상황에서 민주당 당대표를 선출하는 일정이 시작됐다. 새 대표의 우선 덕목은 협치 주도 의지여야 할 것이다. 그건 지난 1년2개월의 통치를 전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선사가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제자에게 물었다. “네가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면 지팡이로 때릴 것이다. 밖에 있어도 때릴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제자는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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