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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전쟁은 참 이상한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터진 전쟁인데 우리 권력층 자제는 전사자를 찾기 힘든 반면 외국군 전사자 중에는 기득권층 아들이 많았다. 미8군사령관이던 밴플리트 대장의 아들도 그중 하나다. 고학력 참전자가 많아 하버드대 졸업생도 17명이 전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포함한 미군 장성의 아들만도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우리 기득권층은 ‘빽’을 써서 아들을 후방으로 빼돌리거나 유학을 보내는 등 입대기피자가 많아 장병들이 전사할 때 “빽” 하고 비명을 지른다는 비아냥이 나돌았다.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만학도로 입학해 받은 첫인상은 선명했다. 본관 현관에 들어서자 벽에 전쟁에서 산화한 졸업생 수백명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배울수록, 권력이 클수록 ‘실질적 병역기피자’가 많다.

대통령조차 19대까지 국방 의무를 다한 이는 둘뿐이다. 군 출신이 셋 더 있지만 군대를 끌고 탈영했으니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두드러기나 ‘양쪽 시력차가 크다’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이 총리나 검찰총장까지 역임한 뒤 대통령이 되겠다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통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병역 문제에 당당해야 한다는 거다. 35대 케네디부터 존슨, 닉슨, 포드, 카터, 41대 조지 부시까지 40대 레이건을 뺀 6명이 해군장교 출신이다.

우리나라 보수 언론 사주는 몇 대에 걸쳐 병역을 제대로 마친 사람이 전무하다. 그런데도 한 보수 언론은 추미애 장관 아들 병가 연장을 비판하면서 ‘들끓는 2030, 빽 없으면 전방서 가축처럼 생고생’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주요 재벌도 LG그룹을 빼고는 병역필을 찾기 힘들다.

내가 문제 많은 징병제 존속을 주장하는 이유는 모병제가 특권을 줄이기는커녕 아예 제도로 보장하기 때문이다. 병역은 원래 시민의 의무였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공공서비스를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국가의 몰락이 가까워온다’고 했는데, 모병제는 정치적 책임의식 저하로 귀결될 수 있다. 전쟁은 대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명령으로 시작되지만 피를 흘리는 쪽은 ‘못 가진 자’들이다. 기득권층도 자식이 입대해 있다면 전쟁을 쉽게 결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계에서 모병제를 택한 나라는 징병제보다 약간 많지만, 50만 이상 대군을 가진 8개국 중에는 징병제가 5개국으로 더 많다. 징병제 국가 중에는 여성도 징집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이스라엘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고,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노르웨이에 이어 스웨덴과 네덜란드도 2018년부터 양성징병제 국가로 바뀌었다. 그 밖에도 검토하는 나라가 많은데, 요인은 한국처럼 남성 징집 대상자가 줄어드는 데다 양성평등의식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력 조건을 통과하면 여군이 못 할 일은 거의 없다. 양성징병제 추진에는 여성정치인들이 앞장선다.

물론 징병제는 문제가 많기에 모병제의 장점을 따와서 대폭 보완해야 한다. 첫째, ‘노예군대’가 아니라면 최저임금은 보장해줘야 한다. 민주연구원은 30만 병사에게 월 300만원씩 주는 모병제를 구상했다고 한다. 연간 10조8000억원이 드는데 징집된 남녀 병사에게 나눠주면 성평등을 성취하면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양성징병제로 입대 대상이 늘어나면 복무기간을 10개월쯤으로 줄일 수 있다. 월급만 올려준다 해서 인생 황금기를 병영에 유폐하고 싶은 청춘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초훈련 뒤 가끔 입소훈련을 받으면 상비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총병력은 늘어난다. 전시나 마찬가지인 이스라엘도 그렇게 군대를 운용한다. 교대로 직장에 복귀해 일하면 경력이 뒤처지지 않고 국방비도 줄일 수 있다. 전시 아닌 평시에 50만 대군을 대기시키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셋째, 군대 규모와 의무 복무기간을 줄이려면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이 동반돼야 한다. 남북한 모두 병력 부족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급감하는 청년인구와 높아지는 성평등의식, 평화를 향한 갈망은 남북한이 함께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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