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서 나만의 취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젊음에 기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도 그 불편함에 굳이 시간과 돈을 쓰는 여행과 관련된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다. ‘투덜이’ 빌 브라이슨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때 비행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행은 장거리일수록 좋았다. 낯선 땅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 이동은 심야 버스나 기차를 이용했다. 패키지여행은 내겐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다르다’고 내심 으스댔었다. 근데 그냥 젊어서 그런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5시간이 넘는 비행은 걱정부터 앞섰다. 오지 트레킹보다는 도시 관광, 숙박은 도미토리가 아닌 호텔로 자연스레 나의 여행은 변해갔다. 그러다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게 일본 소도시 여행이다.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소도시에 숙소를 잡고, 로컬푸드 마켓에서 과일을 사먹거나 일본인들을 따라 식사 때마다 생맥주를 마시는 것. 바로 일본 여행의 재미였다.

6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앞에서 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일본이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노(보이콧) 재팬’,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올해 여름은 다르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함께 지난달 중순부터 자발적으로 ‘일본 여행 안 가기’ 운동이 시작됐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장난스레 올려놓은 ‘친일파’ 테스트에도 일본 여행에 관한 항목이 있다. ‘일본 여행을 자주 간다’ ‘일본말을 할 줄 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한다’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한다’ 등으로 이 중 3가지만 해당되면 친일파라고.

일본이 우리에게 인기 여행지가 된 이유는 길어봐야 2시간 남짓,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관광인프라도 훌륭하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를 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해에만 753만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최근  국토교통부 항공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여름휴가가 본격화된 7월 중순 이후 보름간 인천공항을 이용해 일본 여행을 다녀온 승객은 휴가 시즌을 앞둔 한 달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3.4% 감소했다.

얼마 못 갈 거라던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불매운동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시민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일본 여행 취소 인증샷을 올리고 있다. ‘노(NO), 보이콧 저팬,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로고는 소셜미디어에서 삽시간에 퍼져 서로를 독려하며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도시들과의 문화교류를 잇따라 중단하고 있다. 서울시도 일본과의 교류 중단을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당장 이번달과 다음달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던 교류행사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또한 10월13일 개최 예정인 ‘서울달리기대회’와 관련해 한국미즈노 등 일본 브랜드를 협찬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보이콧’은 아베 정부에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당장 일본의 입장 변화를 끌어낼 순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이 만만찮다는 것은 보여줄 수 있다. 물론 효과를 보려면 6개월 이상 지속돼야 한다. 이제 정부는 냉정해야 한다. 지자체들도 교류를 이어나가야 한다. 이미 국민들은 차분히 일본과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반일 감정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때론 상상 밖의 힘을 발휘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내셔널리즘이 감정에 휩싸인다면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배타주의로 바뀌는 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폭염 속 우리는 견디기 힘든 지점에 서 있다. 일본 대신 집 근처 시원한 도서관으로 북캉스를 떠나보자.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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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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