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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문화재청이 ‘남북문화유산 정책포럼’을 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비무장지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비롯해 다양한 주장과 의견이 나온 것으로 안다. 물론 단골손님인 생태계 보존에 관한 내용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개인 생활사나 비무장지대에 있었던 마을과 관련한 조사와 같은 내용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빠졌다. 

어느 특정한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이 빠졌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한탄강이 임진강과 만나고 다시 그 강이 한강과 만나 서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경기도의 비옥한 땅과 강원도의 험준한 산지가 빚어냈을 문화에 대해서 말이다. 문화란 형체가 있어서 유형이라고 불리는 것과 형체가 없어서 무형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가 있다. 비무장지대에도 다를 바 없이 유형과 무형 두 가지의 문화가 존재하고 그것 외에 전쟁이 남긴 독특한 문화가 하나 더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기도 일대의 비무장지대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과 관련한 삶의 문화가 남아 있다. 약 5년 전, 임진강 일대의 참게잡이를 다시 조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 그물로 잡는 것일 뿐 20여년 전 늙은 어부들이 전해주던 새끼줄에 잘 여문 수수를 거꾸로 매달아 물에 넣는 게잡이 방식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밤새 강물에 넣어 놓으면 여문 수수에 게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새끼줄을 둘둘 말기만 하면 되었다고 했다. 

강 곁에는 강마을이 있기 마련이고 그 마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은 강이었다. 생활이라는 것은 자연과의 투쟁을 말하는 것이고 그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지혜를 짜내고 자연과 맞서거나 혹은 피하며 삶을 강구한다. 그것이 문화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실 강이나 바다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이나 바다 곁에 사는 이들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해마다 굿을 벌이기도 했는데 비무장지대 인근 강마을에서는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고랑포가 대표적이다. 

민통선에서 해제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방한계선 철조망과 붙어 있는 고랑포는 전쟁 전만 하더라도 경기도 일대에서 내로라하던 나루터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있을 정도로 상권이 좋았던 곳이다. 장단이나 개성에서는 수레나 자동차로 농산물이 내려오고 서해바다에서는 새우젓과 소금을 비롯한 갖가지 수산물이 배로 올라왔다. 그곳으로부터 강폭이 현저하게 좁아지는 임진강과 한탄강 상류로는 바다에서 오는 배와는 달리 폭이 좁고 뾰족하게 생긴 배들이 수산물을 싣고 강을 따라 내륙 마을로 흩어졌다. 

물류의 유통이 많은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돈이 흘러 다녔다. 그러니 임진강 수신(水神)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루터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추렴해서 굿을 벌였는데 아주 성대했다. 개성권번에서 기생들과 무동을 불러와서 사흘 동안 굿을 놀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그곳을 조사할 때만 하더라도 당시 개성권번의 기생으로 고랑포 고창굿에 참가했던 이가 문산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노쇠했던 터여서 지금은 살아계시지 않다. 또 고창굿의 현장 모습을 상세하게 구술해주던 권응찬옹은 젊은 시절 장남면 면서기를 했던 터여서 굿을 치르기 위해 들어갔던 비용과 과정까지 상세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술 당시 이미 80대 중반이었으니 그도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굿이 벌어지는 날이면 고랑포와 가까운 개성이나 파주 그리고 연천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는 큰 잔치였다고 했다. 이윽고 굿이 절정에 달하면 무당들이 배를 타고 강 가운데로 나가서 주무(主巫)가 강에 세 차례 뛰어들었다가 나오며 수신을 달랬다고 했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축제가 벌어졌던 마을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축성 양식이 동시에 보이는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이 있다. 그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왕릉이나 성에 올랐다가 돌아가는 것이 전부일 뿐 그 누구도 고랑포에서 고창굿이 벌어졌거나 텅 빈 길 양쪽으로 상가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돌아간다. 

지금까지 말한 지역은 민통선을 포함한 접경지대와 비무장지대 전체에 있어서 작은 점과 같은 곳이다. 바다와 깊은 산속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남겨 놓은 것들은 또 어느 정도일까.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에서는 전쟁 전에 배를 타고 한강 하구인 조강을 건너 북쪽 강안으로 가서 약수를 길어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 마파람이 불기 시작하면 포대에 주워 담다시피 하던 장어잡이는 철조망이 쳐지고 난 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그렇게 비무장지대 일대는 한순간에 문화의 단절이 강제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말이다. 비무장지대는 떠나 올 때 이미 다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의 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곳에는 사람이 살았고 마을이 있었으며 그 마을마다 일구어 놓은 세시풍속과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 나무와 풀이 웃자라고 사람의 공격을 피해 동물들이 숨어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현재가 귀중하지 않다거나 쫓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에 대한 관심을 그동안 귀에 닳도록 들은 생태계 보존만큼 기울였는지는 의문이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 또한 생태계 보존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이다. 

글머리에 말한 포럼이 있던 날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공지가 하나 떴다. ‘숨은 무형유산을 찾습니다. 대국민 제안 공모’라고 말이다. 제안한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비무장지대의 무형유산을 조사하자고 말이다. 온전히 사람이 지닌 무형유산은 사람이 떠나고 나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서둘러 전쟁 전 지금의 비무장지대와 그 인근에 살았던 이들을 찾아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생활의 흔적을 기록해야 한다. 이제 그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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