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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윤 기자

내가 죽기 전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여
맛 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 시집 <작은기쁨> 중에서

봄비가 살짝 얼굴을 간지럽히는 주일. 모처럼 여유가 있어 글방 앞의 매화 세 송이를 따다 찻잔에 넣으니 향기가 진동해 놀라는 마음으로 봄 한 모금을 마셔봅니다. 간밤 꿈에는 누군가에게 발라줄 허브크림을 찾다가 잠이 깼는데 어제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제게 친구수녀가 ‘파스라도 붙여봐’ 하는 말을 듣고 파스를 붙여서 그런 꿈을 꾸었나봅니다. 큰 기대 없이 파스 한 장 붙였을 뿐인데도 통증이 잦아드는 걸 경험하면서, 아프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무심히 듣지 말고 무엇이라도 챙겨주는 배려심을 가져야지, 생각한 그 마음이 아마 꿈으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요즘은 일체의 외부활동을 하지 않으니 수십년 동안 모아둔 편지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지, 청소년, 군인, 성직자, 수도자, 재소자, 장애인, 국내외를 포함한 미지의 독자별로 정리를 하다보면 개인의 사연과 더불어 참으로 다양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인터넷 문화가 덜 발달되어 있던 1980년대의 편지들은 유난히 긴 내용이 많습니다. 지금은 우표도 없어지고 스티커로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름다운 우표들이 많이 붙은 편지들을 보는 일은 늘 설레는 기쁨을 줍니다.

“…제게 힘이 되어준 수녀님의 글들이 헛되지 않도록 이웃들과 함께 사는 세상임을 알고 옆사람의 발밑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디 수녀님께서 소외당하는 이의 아픔을 아시고 어두운 곳에서 찬란한 빛이 되는 삶을 사시도록 신께 기도 드립니다. 모자란 자식을 한 번 더 보듬어주는 어머니가 되옵소서. 어지러운 글로나마 더듬거리며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연천의 어느 부대에서 이런 편지를 보낸 종찬이란 군인도 지금쯤은 중년의 가장이 되어 어디선가 살고 있겠지요. 모자란 자식을 한 번 더 보듬어주는 어머니가 돼라는 그 젊은이의 당부를 앞으로도 열심히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어릴 때 수녀님께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와서 고등학교까지 편지를 나누었습니다… 검정 동전 지갑에서 꼬깃꼬깃 천원짜리를 꺼내셔서 제게 햄버거를 사 주셨는데 제가 많이 감동했습니다. 아직도 그때 수녀님의 마음과 행동은 평생 제가 살아가는 삶에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20년 만에 소식을 전해온 은미라는 아가씨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안산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한 이 편지의 주인공 속의 제 모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어봅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 사람의 삶에 깊은 영향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다시 기억하면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의 한 구절을 자주 떠올리면서 이토록 힘든 시대에 수도자로서 할 일에 고민하며 종종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요즘. 다시 읽어보는 독자들의 옛편지가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하지 못하고 힘겹게 사는 이웃을 위한 현장봉사를 따로 하진 못할지라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글로써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은 거라고!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그 대신 아파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기만 하는 막막함/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삶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라고 시에서도 표현을 했지 않느냐고! 그러니 다시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고 맛있는 언어의 소금 한 톨 꾸준히 찾으라고 저를 다독이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음성을 듣습니다. 20년 전 1월 어느 날의 일기에 메모해 둔 한 구절을 새로운 사명선언문으로 읽어보며 매화차 한잔을 마시는 이 아침. 우울했던 마음에 살며시 희망의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결국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힘든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리라, 예수그리스도께서 항상 우선적으로 눈길을 주었던 힘 없고 아프고 약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야 하리라.”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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