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기 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한다.

누가 들을까 봐도 아닌데

그리운 문소리도 있는데.

 

귀 조금 밝히고 보니 이즘 사는 일

조약돌 밑으로 꼬리 감춘 눈석임물.

흐르긴 흐르는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는가?

 

감각들이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싸락눈 내리는 기척 분명한데.

눈과 귀는 창 앞에서 더듬대고 있다

그래도 볼펜처럼 이만 끝! 아닌 게 다행?

 

어디까지가 다행일까?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숨 쉬고 소리로 노래하고 몸부림치며

소리로 밑도 끝도 없이 깊어지는 이 겨울밤.

황동규(193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이가 들면 귀로 소리를 듣는 힘도 약해진다. 귀에 보청기를 꽂은 시인은 무뎌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없어지듯이 차츰 약해지고 꺼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빼족하던 연필심이 점점 뭉뚝해지는 것처럼 감각이 서서히 무디어지고 둔해지는 게 그나마 다행 아니냐고 자문한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음에도 수많은 역작을 작곡한 베토벤이 감내했던 ‘소리의 어둠’을, 그리고 그의 예술혼을 생각한다. 황동규 시인은 “시(詩)에서 내려 침묵을 듣고 싶다”라고 쓴 적이 있다. 침묵은 너무 커서 밑도 끝도 없다. 요즘 겨울날 밤의 침묵은 목탄(木炭)보다 검고, 강(江)처럼 길다. 그러나 침묵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소리들이 간신히 결박되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아직 쏟아지지 않은 그 소리들을 들으려는 것이리라.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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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