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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되고 늙었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피곤해해서도 안 된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 이른 나이도 없고 너무 늦은 나이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에는 아직 나이가 안 됐다거나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실린,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편지 중 일부입니다. 얼마 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제3기 서양고전철학 원전 읽기(서양고철)를 시작하며 에피쿠로스의 이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2011년 8월, 이 모임의 시작을 기다리며 누군가가 공동체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서양고철이 닻을 올리던 당시의 긴장과 설렘이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서양고철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서 소피스트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요 원전을 모두 읽고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선정된 원전을 한 번 읽는 데 5년 안팎의 대장정이 필요한 모임이지요. 이 모임을 지도하는 학자는 그리스·로마 원전 학술연구 단체인 정암학당 김주일 박사. 공교롭게도 서양고철은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점이 많습니다. 철학과 우정의 공동체인 점이 우선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를 창시하고 이끌던 에피쿠로스에게는 정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함께 철학을 공부하며 출신과 계급을 넘어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바로 에피쿠로스의 정원입니다.

서양철학사에 따르면 이 정원에는 철학을 공부하는 제자와 친구, 그들의 자녀와 노예뿐 아니라 심지어 매춘부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정원을 비웃었지요. 그러나 비웃던 이들도 공동체의 따뜻한 우정은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학파들은 거의 계보가 끊어졌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계속 이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이겠지요.

시작한 지 만 11년, 서양고철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20대 학생에서 60대 은퇴자, 주부, 자영업자, 회사원, 교수, 교사, 의사, 한의사, 회계사, 기자, PD, 피아니스트, 공무원…. 세대도 출신도 달랐지만 서양고철은 뜨거운 토론이 살아있는 공부 모임이자 우정의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공식 모임 못지않게 이들이 즐긴 것은 간혹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뒤풀이 토론이었습니다. 휴가철이 되면 MT를 떠났고 연말에는 피아노 연주가 있는 송년회도 열었지요.

지난해 새로 번역 출간된 <유명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도 이 모임과 인연이 있습니다. 2014년 7월부터 2년여 계속된 이 책의 초역 독회 강좌에 서양고철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으니까요. 강좌에서는 책의 초고를 읽은 수강생들이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고 이는 책의 번역과 주석 작업에 충실하게 반영되었습니다. 수강생들이 수동적으로 강의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 셈입니다.

얼마 전 새로 시작된 서양고철에도 여러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처음 온 사람도 있지만 제1기, 제2기 모임에 이어 이번 모임에 또 참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5년, 10년 만에 다시 읽고 토론하는 그리스철학 원전의 맛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고 입을 모읍니다. 김주일 박사가 한번 시작하면 5~6년이나 걸리는 대장정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그동안 번역된 원전도 늘었으니 이들이 예정된 책을 모두 읽으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사이 공동체는 연륜을 더해가고 참여자들은 나이를 먹을 테지요.

그리하여 이 모임이 끝날 즈음 참여자 가운데 누군가는 설레면서도 어색하던 2022년 여름의 첫 모임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철학을 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편지와 더불어.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연재 | 인문의 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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