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인생+] 상처에게 말 걸기

경향 신문 2022. 10. 6. 10:36

강연장에서 퀴즈를 내어 청중의 주의를 환기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제다. 많으면 많을수록 잘 안 보이는 것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질문인데, 정답은 어둠이다. 여기에서 어둠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시야의 장애물이다. 이런 논리라면 안개도 답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전에 노숙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이 문제를 냈을 때, 의외의 답이 나왔다. “눈물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한마디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인생의 애절함이 배어나는 듯했다.

누구나 살면서 이따금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서는 평생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한 분이 김창열 화백이라는 것을 지난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가 반세기 동안 천착해온 수십만 개 물방울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탄압을 피해 홀로 38선을 넘었고, 한국전쟁에서 온갖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며 그 자신도 여러 번 죽을 뻔했던 경험이 거기에 깔려 있다. 비명과 기도를 넘나드는 절박함이 눈물에 담겨 있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김 화백은 전쟁의 외상을 스스로 치유하면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작업한다고 고백한다. 그의 물방울은 고통의 심연에서 스며 나오는 분비물이자, 상흔을 씻어내는 정화수였다. 살아남은 자로서 한순간도 삶을 낭비할 수 없다는 소명의식으로 쉬지 않고 진혼곡을 불러온 것이다. 그의 회화에서 물방울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을 넘어선 신비의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독특한 점은 부자간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기획, 촬영, 편집을 모두 진행한 김오안 감독은 김 화백의 차남으로서, 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생애사를 탐구한다. 자라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그 속에는 ‘드러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무엇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 내밀한 어둠을 추적하다가 역사를 만나게 되고, 오직 물방울에만 매달리는 아버지를 가리켜 ‘피를 순수한 물의 원형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사’라고 말한다.

부모의 상처가 자녀의 운명이 되기 일쑤인 세상에서 이 영화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지를 시사해준다. 우선 김 화백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예술로 형상화하고 승화시킴으로써 폭력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른바 ‘외상 후 성장’이 이뤄진 셈인데, 심리 치료사였던 프랑스인 아내의 도움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가족에게 그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들은 어색한 간격을 넘어 말 걸기를 시도한다. 마침내 아버지의 거대한 슬픔을 마주하면서 삶과 죽음의 기묘한 맞물림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이 시대와의 불화 내지 균열을 느끼는 지금, 삶이 붕괴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버팀목이 절실하다. 상처는 분노의 파편이 되기 쉽지만, 서로를 잇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앞세대의 고통은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런 연금술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영롱한 마음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시적인 영상으로 연민의 고요한 힘을 일깨워준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연재 | 인생+ - 경향신문

66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기사를 구독하여 새로운 기사를 메일로 먼저 받아보세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 초기화

www.khan.co.kr

 

댓글
댓글쓰기 폼
«   2022/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6,494,113
Today
0
Yesterday
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