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인데?” 한 친구를 매개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거기에는 중년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다. 친구는 그와 내가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에게 내 정보를 흘렸고, 그는 관심 보이며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작품을 준비하며 친구들의 사례를 촬영하고, 랩도 배우고 있다고 답했더니 대뜸 돌아온 말은 별로라는 ‘평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별로인지, 만약 정말 별로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만 뒤따른다면. 그러나 그는 면접관이라도 된 양 질문만을 이어갔고, 내 답변에 대한 반응으로는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네 작품은 안 뽑겠는데?” “내가 프로그래머라면 상영 안 하겠는데?”와 같은 깎아내림만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관련 경험이 나보다 많은 사람이니 성실히 정보를 제공하면 뭔가 쓸 만한 통찰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헛된 기대였다.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털린 것만 같은 기분.

“그런 사람들 문창과에도 많아요!” 며칠 뒤 시와 소설을 쓰는 지인들과 만났을 때 그 감독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다들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겠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 소설가는 한 창작 비평 모임에서 써 온 작품에 대해 폭언에 가깝게 깎아내리며 글쓴이를 낙담시킨 뒤, 술자리에서는 다정하게 대하며 격려하는 방식으로 후배를 길들이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선배는 정작 자기 소설은 안 쓰고 남의 소설 평가하는 데 열심이라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할 때 느껴지는 우월감. 자기 말을 귀담아듣는 존재를 눈앞에 두며 일종의 권력을 확인하는 감각에 취한 채 고여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길들이기’ 방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일도 수차례였다고.

그러고 보니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쉽사리 휘둘렸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들어간 뒤의 삶을 경험해 본 적 없어 막연했고, 일단 입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고, 손에 쥔 것을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되고, 내 것이 보잘것없어 보여 불안하고…. 그 시기, 가고 싶은 길을 앞서가는 사람은 영웅처럼 보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설령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불리 가능성을 재단하는 말이더라도. 이제 생각해보니 그 녀석들도 갓 회사 생활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을 텐데, 후배들 훈계하며 뭐라도 된 기분을 만끽하고, 우러름 받으며 자존감 부풀리고, 잠재적 연애 대상을 물색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 삶을 택했다. 몇 가지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벌였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은 남들이 뺏어갈 수 없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덕에 이제는 수평적으로 의견과 감상을 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비틀린 마음으로 폭언을 일삼는 대상을 분별하는 눈을 얻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고 또 당해버렸네.

쉽게 일축할 수 있는 직업적 명사보다 꾸준히 해온 행동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 활동은 주로 말과 글로 이뤄졌지만, 더 효과적이라면 다른 방법을 익혀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심자로서 새로운 기술과 감각을 익히는 시기, ‘자존감 강탈자’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것. 나이 먹는다고 절로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게 아니며, 경험 부족한 이들을 휘두르며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는 것. 또 한 번 경험했네. 앞으로도 새로운 분야에 흥미 생기면 또 뛰어들 텐데, 그때마다 거듭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어쨌거나 나는 그때 그 다큐멘터리 감독이 혹평했던 그 기획 그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상영의 기회와 관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고, 영화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감정이 와 닿았다고 말하는 관객들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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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