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1917~1945)


한 사나이는 산기슭의 불룩하게 나온 귀퉁이를 돌아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간다. 우물의 저 깊은 수면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의 움직임이 비치었고, 맑은 바람이 돌고, 선선한 가을이 있다. 그리고 거울 같은 우물물에 비친 한 사나이의 얼굴이 있다. 시인은 이 우물물 속 사나이를 보고선 뜻이 맞지 않고 초라한 몰골에 밉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가도 머잖아 안쓰러운 마음을 갖는다. 우물물에 비친 사나이는 시인의 자화상인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자괴의 탄식과 딱하게 여기는 연민이 교차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39년에 발표되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고뇌와 고독이 담겨 있다. 스스로 자신을 바로 보아 양심에 거리끼고 떳떳하지 못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큰 용기이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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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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