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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있는 책을 정리했다. 얼추 세어 보니 3500권 정도 된다. 책 욕심이 많아 좋은 책이 나오면 일단 사고 본다. 절판된 책이 있으면 동네 헌책방을 뒤지거나 인터넷 헌책방에 검색해서 사들이고 만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책을 읽지 않아 바보처럼 세상을 살았던 게 한이 맺혔기 때문이다. 내가 2006년에 낸 책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서문에 그런 내용을 썼다.

“책이 제 삶을 바꿨습니다. <쿠바와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세상 사는 게 왜 이렇게 답답하고 힘들까. 내가 못나서 그럴 거야. 못 배운 게 죄지.’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며 살다가 그 만화책을 한 권 보니 깜깜한 굴속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태백산맥>을 보고,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찢겨진 산하>, <거꾸로 읽는 세계사>, <노동의 새벽>,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같은 책들을 골라서 읽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고 저는 학교와 사회에서 멸공 극우 사상과, 어처구니없는 독재 사상만 배웠다는 걸 알았습니다.”

<쿠바와 카스트로>는 내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병장으로 제대한 뒤, 버스운전사로 일할 때 읽었다.

만일에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일베나 어버이연합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이른바 ‘가스통할배’로 살았을지 모른다. 이명박이 저지른 4대강 사업을 가뭄을 해소하는 친환경사업인 줄 알았을 거고, 박근혜가 미국에 빌붙어 밀어붙이는 사드 배치를 이북의 도발에 맞서 ‘화려한 금수강산’을 지키는 무기인 줄 알았을 게다.

책은 나를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예처럼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당당히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노동자’로 태어나게 했다. 책은 이렇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다. 한국의 민주화와 변혁운동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고,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7월 14일 서울 중구 봉래동 서울역에서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성과연봉제와 퇴출제 반대 선전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얼마 전 기가 막히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28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4대 소속 보안수사팀이 철도노동자 이진영씨 집을 압수수색하고 이씨가 소장한 책 107권,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 USB, 스마트폰 등에 소장된 전자파일 3400여개와 스캐너를 임의 압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압수한 물품 가운데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러시아혁명사> <자본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등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서적이 다수 포함됐다고 한다. 서울경찰청은 그 책들을 ‘이적표현물’이라며 압수하고 이씨를 국가보안법(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한다. 그런 책들은 나도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도 이적표현물 소지로 보안법 위반인가?

경찰은 왜 이진영씨를 보안법으로 기소하려는 걸까? 이씨는 철도노조 조합대의원과 지부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책’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노동자의 책’은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노동운동 등 사회변혁을 다룬, 절판된 서적을 소장하고 이를 전자도서(PDF)로 전환해 회원들과 공유하는 사이트다). 그리고 철도노조는 다가오는 9월27일에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을 예고했다. 이씨는 그 두 가지가 경찰이 자신을 기소하려는 목적이라고 보고 있다. 첫째는 ‘공안기관이 사회과학을 학습하려고 하는 일반인과 노동자들에게 현재 구하기 어려운 서적을 공급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것’, 둘째는 ‘9월27일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에 앞서 철도노조 조합원인 이씨를 문제 삼아 노동투쟁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경찰이 이씨에게서 압수한 물품에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이 발행한 문서도 포함되어 있고, 이씨가 전면파업을 촉구한 사실을 문제 삼는 걸 보면, 이씨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까지 통제하고, 비판적인 지식인과 노동자를 고문하고 죽이고, 입을 틀어막았던 수구세력들의 무기, 국가보안법. 국가는 여전히 보안법으로 ‘좋은 책’조차 못 읽게 하면서 인간을 ‘개·돼지’로 만들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들이대는 국가보안법. 참 질기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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