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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아침, 늘 다니던 등굣길이 아니라 조금은 낯선 출근길에 마음 바쁠 네게 편지를 쓴다. 어느새 고3이 되었나 싶었는데 벌써 그 시간 끝자락에 섰구나. 얼마 전 네가 전화로 취업 소식을 전했지. 몇 차례 면접을 본 뒤라 전화기 저편 목소리가 밝더구나. 내 휴대전화기에 뜨는 네 이름 뒤에는 ‘○○중3’이 덧붙어 있어. 네가 중3이었을 때 처음 만난 게지. 이제 더는 중학생이 아니니 지워야지 생각하면서도 편집 단추를 누르고 삭제 단추를 누르는 일을 자꾸 미룬다.

지난해 봄, 우연히 너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날이 있었지. 식당을 향해 나란히 걷는 길에서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너는 내 옆에서, 내 앞에서 뭔가 혼자 계속 망설이더구나. 무척 말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절대 말하기 싫은 마음이 입으로, 눈으로 불쑥불쑥 삐져나왔지. 어떤 말은 밖으로 나오기까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해. 남에게는 심각하지 않아도 단 한 사람 자신에게는 무겁고 아프고 절실한 말.

오래전, 그때 일흔이었던 한 어르신을 만난 일이 있어. 그분한테 돌아가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였어. 이야기가 몇 고개를 넘다 막다른 곳에서 당신이 60여년간 숨겨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어. 병든 어머니가 혼자 산막에서 돌아가셨대. 이렇게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지? 하지만 열두 살 어린 여자아이는 그 일을 가슴에 콱 묻어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어. 커가면서 알게 된 친구에게도 함께 살림을 꾸린 남편에게도 착하디착한 자식들에게도. 차마 가보지도 못하고 외할머니께 전해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말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많은 해가 지나도 바로 어제 일인 듯 눈물을 쏟으셨어. ‘마음이 아프다’는 게 기분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걸 그날 알았어. 가슴 한복판이 쑤시고 아려 주먹으로 쳐대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밤새 가라앉질 않았어. 60년 된 이야기,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

지난해 봄 네가 처음 꺼냈다가 올가을에 이어서 해준 이야기. 네게도 10년이 된 이야기가 있더구나. 어느 일요일 아침, 네가 울린 전화. 만나고 싶다는 네 말에 언제 만날까 달력에서 날짜와 요일을 헤아리다 갑자기 이게 아니지 싶었어. 네가 전화한 건 ‘지금’이 필요해서일 텐데 싶어 당장 그날 만났지. 네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봤어. 그 봄에는 울었는데 이 가을에는 울지 않고 이야기를 했지.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며 웃었지. 돌아서면, 혼자 있으면 다시 아플지 몰라도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네 스스로 활짝 폈지.

취직을 축하한다 말했지만, 사실 걱정이 앞서. 회사가 근로기준법은 제대로 지킬지, 함께 일할 선임들은 공명정대할지, 성차별에 성희롱·성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은밀하게 벌어지는 건 아닐지.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지, 어엿한 동료 노동자로 인정하며 대우해줄지, 네가 한 사람으로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곳인지. 잘못되고 부당한 것에 기죽지 말고 “안돼!”라는 말을 네 있는 힘껏 소리치기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 믿는 수밖에.

그런 모든 걱정을 안고서도 축하해. 네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첫 발걸음을 무엇으로 축하해줄까 생각하다 선물을 하나 마련했어. 여성의 삶과 노동에 집중해 여러 글을 쓴 작가 안미선씨가 얼마 전에 낸 <모퉁이 책 읽기>(이매진)라는 책이야. 글 마흔 편에 책 마흔한 권을 소개했어. 그런데 읽다 보면 글 안에 새로운 책이 더 많이 나와. 두고두고 읽을 책이 생기는 거지. 어디서 쉽게 구하지 못할 목록이 될 거야. 책 이야기만큼 마음이 가는 게 있는데 바로 사람 이야기야. 삶의 여러 모퉁이에 서 있었던 작가와 작가의 친구들, 작가가 만난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소개하는 책 안에서 숨 쉬는 여자들을 만날 거야. 네가 아직 겪지 않은 시간, 가보지 않은 길 위에 먼저 섰던 여자들이 네게 친구가 되어줄 거야. 마음결이 섬세한 작가가 세밀하게 펼쳐 놓은 글에서 너는 힘을 얻을 거야. ‘저래서 여자는 안돼’라는 맥락 없는 말이 흉기가 되어 버젓이 판치는 세상에서 네가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을 북돋아 줄 거야.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그 뒤를 이어 네 이야기를 써보렴. 책 속 여자들과 책 속의 책 속 여자들이 함께 기뻐할 거야. 곧 만나자.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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