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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잘 살고 있니?

경향 신문 2016. 7. 27. 10:39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 살고 있니?” 이 말이 너무나 애절하고 먹먹해서 바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다소 장황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제야 내가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한 게 애절함과 먹먹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지극히 예사로운 저 질문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게 과연 뭘까. 잘 사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친구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잘 살고 싶다.” 몹시 부끄러웠다.

올해는 고등학교에 두 번 다녀왔다. 예술 고등학교에 가면 으레 시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단어를 찾을 수 있는지,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게 된다. 시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운다. 실없는 농담까지도 진담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들은 진지하고 절박하다. 강의가 끝나면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나는 온몸이 기진맥진해진다. 시 이야기를 하며 내 열성을 다 쏟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의 눈빛에는 아직 열정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올해 찾아간 고등학교는 둘 다 일반 고등학교였다. 두 시간 동안 시 쓰는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할 것 같아 나는 시를 읽는 법에 대해 강연했다. 시를 읽으려면 세 가지의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되어보는 일, 들여다보는 일, 새겨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되어보는 일을 통해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성별, 국적, 나이 등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들여다보는 일을 통해 ‘왜’에 한 발짝 다가설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새겨보는 일을 통해 그 상황이 나에게 닥쳤을 때를 가늠할 수 있다고도 했다. 시와 내가 한몸이 된 것 같은 근사한 순간에 대해서도 말했다.

강연이 끝나자 한 아이가 물었다. “근데 시 써서 먹고살 수 있어요?”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어려운 질문이어서가 아니었다. 아이의 질문이 당돌해서도 아니었다. 먹고살 수 있다고 선선히 대답할 수 없어서였다. 이어지는 질문들도 내 진땀을 뺐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선 어떤 일을 하세요?” “왜 하필 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이들은 확실히 시보다는 삶에 관심이 있었다.

삶은 생활이라기보다는 생계나 생존에 가까운 듯이 보였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아무도 기꺼이 ‘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와 가까워지기 위해 마련된 자리는 순식간에 진로 특강으로 변모했다. 구석에 있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를 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잘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 살고 싶어서요.”

‘잘살다’는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잘사는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하지만 잘산다고 해서 무조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윤택함이 그 사람의 영혼까지 살찌워줄까? 적어도 내게는 잘 사는 것이 잘사는 것과 거리가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잘살아야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물질적 여유는 정신적 여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도 선뜻 사지 못하고 커피 한 잔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면서 잘 산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살기 위해서 앞으로만 질주하는 삶에는 이런 소소한 여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아예 없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는 값이 매겨지고 이것이 행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로 작용한다.

잘사는 것이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잘 사는 것은 정신에 상당 부분 기대어 있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미소를 짓는 것, 문득 떠오른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 신문으로 접한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자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육안으로 보이는 별의 개수를 세어보는 것 등 잘 사는 것에는 삶의 결을 헤아리는, 하루하루의 의미를 찾으려는 능동적 태도가 수반된다. 또한 잘 사는 것은 주변에 마음을 쓸 것,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행해지는 피땀 어린 움직임들을 헤아릴 것, 어떤 경우에도 비겁해지지 않을 것 등 삶의 목표나 의지와 연결되기도 한다.

잘사는 사람이 잘 살지 못할 수도 있고, 적게 가지고도 잘 살 수 있다. 서른다섯 명의 부고를 모은 최윤필의 책 <가만한 당신>(마음산책, 2016)을 펼치면 이런 문장이 가장 먼저 나온다.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 나도 그렇다. “잘 살고 있니?”라는 질문에 “응, 잘 살고 있어”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삶, 나는 오늘도 이런 삶을 꿈꾼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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