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심심산곡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찾아가는 북한강이 심심한 듯 크게 용틀임을 할 때, 이에 호응하여 경기 근방에 가까이 집합한 산들이 막역한 친구처럼 첩첩하게 도열한다. 명지, 연인, 칼봉, 운두 그리고 천마. 마치 돌올한 산악문명이라도 곧 발흥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봄이면 이 산마다에 야생화의 잔치판이 벌어지는 건 이런 지리적 사연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산으로 들 때, 그 산의 이름을 통한 내력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오늘 찾는 곳은 저 문명의 한 축인 축령산이다. 산은 완만하다. 초입에서 잠깐 가파른 길을 더위잡아 오르니 바로 산천경개가 툭 트인 능선이다. 잎이 모두 떨어진 산. 나무는 물론 산의 전모가 훤히 드러난다. 어느덧 남이바위에 서니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에 적응한 소나무가 홀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저 아래 다정한 인간의 마을에 지곡서당이 있건만 글 읽는 소리 끊어진 지 오래!

축령산은 祝靈山이다. 그 이름이 퍽 희한해서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하는 산, 축령산. 축에 촉발되어 희미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중국소설을 전공하는 분들을 따라 주자(朱子)의 고향 무이산을 갔었다. 주자기념관을 둘러보는데 어머니의 장례식에 관한 자료 중의 여러 글귀가 축(祝)으로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것은 결혼식장에 잘못 배달된 조화처럼 아주 낯설고 희한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알고 보니 주자 어머니의 이름이 축씨였던 것. 축령산을 걷는 내내 어쩐지 그때 퍽 낯설었던 옛 생각이 자꾸 났다.

축령산 정상에서 한숨을 돌린 뒤 이웃한 서리산으로 간다. 서로 뽐내지 않으며 그 능선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곡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 등산을 축령산-서리산으로 마무리하고 보니 무슨 근사한 목걸이를 완성하는 기분이었다. 그 목걸이의 고리에 해당하는 곳에 이르니 우람한 나무들이 공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이 지역에 맏형처럼 자리잡고 묵묵히 하늘을 받드는 잣나무였다. 그늘을 좋아해서 아주 단정하고 기품 있게 뻗는 나무. 송무백열(松茂栢悅·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이라고 했던가. 잣나무, 소나무과의 상록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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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