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재미없이 봤던 영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평결(The Verdict)>이라는 영화입니다. 평결은 배심원의 협의 과정과 그 결론을 말합니다. 사건 내용은 전신마취를 하려면 식후 9시간은 지나야 하는데 식후 1시간 만에 마취를 해서 구토를 일으키고 식도가 막혀 호흡 곤란으로 코마 상태가 된 환자를 대리하는 변호사 이야기였습니다. 환자는 셋째 아이를 낳다가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보스턴에서 대교구가 운영하는 병원의 유명한 의사 두 명이 연루된 사건인데, 흔한 영화의 전개 과정으로 원고 변호사는 여러모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반대로 피고 병원 측은 변론 준비를 위한 회의에 10명 이상의 변호사가 참석하고 증인신문 준비를 위해 실제 법정 상황까지 재연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뻔한 구도에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뻔한 줄거리라 영화는 지루했습니다. 전개 과정도 지금 우리가 만드는 영화에 비하면 수준 미달이었습니다. 나이 든 폴 뉴먼의 깊은 눈을 바라보는 재미 정도로 졸음을 쫓았습니다. 마지막 반전이라는 것이 4년 전 수술 당시 의료기록을 의사 지시로 조작했다는 간호사를 찾아내 그 증언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1시간 전이라고 기록했는데 의사가 숫자 ‘1’을 ‘9’로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저 같은 법률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증인이 사전 신청 없이 법정에서 즉흥적으로 채택됩니다. 그리고 4년 전 상황을 진술합니다. 이때 증인이 나중에 문제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에 ‘1’자로 적어놓은 기록을 사본해 두었다고 하면서 제출하려고 합니다. 원고 대리인은 판세를 뒤집는 진술을 받아내고 안도합니다. 하지만 피고 대리인은 능숙하게 대처합니다. 사전에 반대신문을 준비할 수 없었다, 4년이 흐른 오래전 이야기다, 증인이 소지한 ‘1’자가 적힌 기록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라고 주장하며 사본을 증거 채택하지 말 것과 증언의 기록 삭제를 신청합니다. 재판장은 피고 대리인의 신청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 영화 내내 재판장과 피고 변호사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뉘앙스를 깔았습니다. 재판장은 사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고, 배심원들에게 증인의 증언은 평결의 근거로 삼지 말도록 설명합니다. 

결론은 어땠을까요? 재판장이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영화의 결말은 원고 승소였습니다. 아무리 재판장이 사본은 없던 걸로 쳐라, 들은 게 있어도 안 들은 걸로 쳐라, 이렇게 요구한다 한들 한번 들은 기억이 어디 가나요? 인식의 조작은 여간해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결론에 영향을 미친 증거법칙 위반은 항소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배심이 내린 결론은 잘 바꾸지 않습니다. 

제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영화에서 배심원을 묘사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심원은 그저 평범한, 대사 한마디 없는 벽에 걸린 그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 12명이 셋째 아이를 낳다가 뇌사 상태에 빠진 여인을 위한, 그리고 저명한 의사 두 명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평결을 합니다. 평결을 하던 딱 그 순간에만 배심원이 누구였는지 제대로 얼굴이 나오고 목소리가 나옵니다. 삶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주인공은 바로 이름 없이 평결을 한 배심원, 말하자면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배심재판을 채택하기 전에 제작되고 상영된 영화였습니다.

우리 형사 사건에 배심재판이 가능합니다. 2008년 1월1일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으니까 제법 시간이 흘렀고, 사건 수가 점점 쌓여갑니다. 그런데 갈수록 국민참여재판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사법권은 주권자인 국민의 것입니다. 배심재판은 현명한 국민이 선택한 괜찮은 제도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이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동지섣달 긴 밤에 지루한 영화 한 편, 이 글로 몇 분 만에 감상한 걸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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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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