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밝다와 붉다는 모두 ‘불’에서 파생한 말이다. 불은 자체로 빛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핵심 물질이었다. 붉은색은 태양의 색이자 피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붉은색에 광명, 희망, 생명, 권위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아시아에서든 유럽에서든 붉은색 옷은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붉은색 관복은 정3품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붉은색에는 고귀함이라는 의미도 따라붙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군중은 청·백·적 삼색의 표지를 모자에 붙이고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다. 이 혁명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현재 프랑스의 국기로서, 청색은 자유, 백색은 평등, 적색은 박애를 의미한다. 이후 민주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많은 나라가 삼색을 국기에 채용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삼색기의 붉은색은 대체로 박애·정열·애국 등을 표상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김두봉은 상해 청년들에게 태극기의 색깔에 대해 “청색은 자유와 힘을 상징하며, 적색은 평등과 사랑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적색에 평등의 의미가 있다고 본 이유는,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기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랑스혁명 당시 붉은색의 또 다른 의미는 계엄이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유혈사태’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붉은 기를 썼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부의 논리를 전복하여 붉은 기를 혁명의 깃발로 바꿨다. 그들은 반역자는 부르봉 왕조이며, 계엄의 주체는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기가 삼색기로 바뀐 뒤인 1848년 2월,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파는 삼색기에 대항하여 붉은 기=적기(赤旗)를 자기들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후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적기는 혁명파의 보편적 상징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혁명이란 본래 ‘천명(天命)이 바뀌는 것’, 즉 왕조 교체를 의미했다. 민중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튼 것은 19세기 최말기였고, 1919년 3·1운동 전후에야 민국(民國)에 대한 지향이 지식인들의 의식 안에 뿌리내렸다. 왕조 권력이나 제국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혁명이라는 생각도 이 무렵부터 확산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혁명파의 상징은 적색, 왕당파의 상징은 백색이었다. 러시아인뿐 아니라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백계와 적계로 나뉘었다. 한국인들도 이때부터 적색에 혁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변화에는 언제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1921년, 혁명을 지향하는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흑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의 상징색은 흑색이었다. 2년 뒤 이 단체는 공산주의자들의 북성회와 무정부주의자들의 흑풍회로 분열했다. 북성회는 적색을, 흑풍회는 흑색을 각각 상징색으로 삼았다.

1926년,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근대법의 대원칙을 묵살한 법령이었다. 이로써 행위 없이 생각만으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처벌받는 ‘사상범’이라는 범죄(자)가 생겼다. 총독부 관계자는 이 법령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회주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폭력혁명론과 의회주의를 구분하겠다는 취지였으나 탄압은 무차별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한반도에서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 일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이 고조되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생겨 사상범과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노랭이’에 이어 사람의 성향을 색깔로 표현한 두 번째 단어였다. 둘의 공통점은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불리는 이름이라는 점뿐이었다. 노랭이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으나, 빨갱이는 중세의 ‘대역죄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중세의 대역죄가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듯이, 근대의 빨갱이도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다.

일제는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제정하고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빨갱이’들을 늘 감시하고 강제 전향시키는 체제를 갖췄다. 해방 후 극심한 이념대립과 전쟁, 분단을 거치면서 이 체제는 법과 제도의 차원을 넘어 관행과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공산주의자, 그들의 가족·친척·친구는 물론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는 시대 정신이 되었고, 빨갱이로 지목된다는 것은 곧 ‘생의 종말’을 의미했다. 한국전쟁 후 발급된 도민증 중에는 사상 기재란을 둔 것도 있었다. 여기에 ‘좌(左)’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람은 사실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빨갱이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일상적으로,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은 빨갱이로 지목되지 않는 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희생양 삼아 사익을 챙기려는 사악한 욕망이 분출했다. 남을 빨갱이로 지목하는 데에는 작은 트집거리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나, 지목된 사람은 ‘빨갱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 불공평한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빨갱이를 식별하는 방법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항의를 잠재우는 마법의 언어가 ‘말 많으면 빨갱이’였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혁명의 시대’는 반세기 전에 끝났다. 하지만 한국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많다. 문제는 불의한 권력이 빨갱이의 범주를 필요에 따라 확장해 온 역사 때문에, 그들 스스로 ‘빨갱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묻지마 살인’의 충동은, 아무에게나 빨갱이 낙인을 찍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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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