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글자 그대로 일본과 친한 일파 또는 정파(政派)라는 뜻이다. 이 말을 처음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조선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이를 친일파 대 친청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규정하여 본국에 보고했고, 일본 언론들도 이런 인식을 공유했다. 그들은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일파를 친일파, 독립파, 개화파로, 나머지 조선 정부 내 주류 세력을 친청파, 사대파, 수구파로 구분했다. 그들은 친일을 독립과 개화, 친청을 사대와 수구에 연결시킴으로써 자기들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한 선의의 협력자인 양 행세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도 주한 일본 공사관은 개혁 주도 세력을 친일파로 분류했다. 그러나 일본의 왕후 시해와 내정 간섭에 반대해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음에도, 이 무렵까지 한국인들은 ‘친일파’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열강이 한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친일 친러 친미 친청 등을 모두 선택 가능한 태도로 보았거나, 그들 사이에서 시비를 따질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인들이 ‘친일파’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 즉 ‘자기 일신과 일족만의 영달을 위하여 일본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면서 동족을 괴롭히는 자’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을사늑약 이후, 특히 1907년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 이후였다. 1907년 8월 공립신보는 친일파를 이렇게 정의했다.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나라를 팔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황상폐하를 능욕하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동포를 학살하며, 잔인하고 악독하여 사람의 낯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 친일파와 같은 뜻으로 ‘토왜(土倭)’라는 말도 썼다. 근래 모 당 대변인이 사용한 ‘토착왜구’라는 말 때문에 새삼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 말은 해방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 종종 오르내렸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는 ‘토왜’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1) 일본과 각종 조약을 맺을 때 세운 공을 내세우며 이권을 얻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자, (2) 흉계를 숨긴 각종 성명을 내어 백성을 선동하는 자, (3) 일본군에 의지하여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4) 일본군의 밀정이 되어 무고한 양민을 죽음으로 이끄는 자, (5)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자로서 누군가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면 허무맹랑한 말로 모함하여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자, (6) 일본어를 조금 안다고 가짜 채권을 꾸며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자. 친일 고위 관료, 친일 언론인과 교육자, 일진회 등 친일단체 회원, 일본군 밀정, 기타 일본을 배후에 둔 사기 범죄자 등을 두루 ‘토왜’로 지목한 것이다.

‘친일파’라는 단어에 토왜, 매국노, 민족반역자, 사익 지상주의 모리배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로 인해 새로운 대일 관계 위에서 친일의 개념을 재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친일에 결부된 온갖 부정적 의미가 과거의 망령이 되지 못하고 현존하는 권력으로 남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반민족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의식이 지배적 지위를 점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의식은 다음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도덕 관념이 결여된 힘 숭배의식이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힘이 약했기 때문이며,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담론이 횡행했다. 이런 의식에서는 침략자와 그에 협력한 자의 불의와 부도덕성은 감지되지 않는다. 자기 힘을 과시하며 약자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현대 한국의 ‘갑질 문화’도 이런 의식의 소산이다.

둘째는 약자 혐오와 엘리트의식이다. 힘 숭배의 짝이 약자 혐오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사회 문제를 약자들이 분수에 넘는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자들이 일본 통치의 야만성은 외면하고 한국인의 저항만을 문제 삼았던 것이나, 현재의 기득권세력이 재벌의 전횡은 외면하고 최저임금만을 문제 삼는 것은, 완전히 같은 의식의 소산이다.

셋째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 구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시아 각국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생각을 바꾸어 일본인은 스스로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유럽인의 관점에서 다른 아시아인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명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다.

이후 일본은 자기 편리한 대로 아시아의 대표 국가가 되었다가 비(非)아시아 국가가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친일 엘리트들은 일본인의 이런 아시아관을 축소해 자기들 나름의 ‘한국관’을 만들었다. 그들은 일본을 대할 때는 한국인의 대표로, 한국인 일반을 대할 때는 준(準)일본인으로 행세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오늘날 한국 기득권층 중에 의도적 이중국적자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의식의 소산이며, 자칭 애국세력이 성조기, 이스라엘기, 일장기까지 들고 시위하는 것도 정체성 혼란의 발로이다. 빈곤한 자의식을 보강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권위를 외부에 의탁하려 드는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친일’이라는 단어가 욕으로 쓰이는 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들이 과거 반민족 행위자들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대중의 눈에 그런 사실이 보이는 한, 친일파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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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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