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이라는 해괴한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음식점이나 상점 종업원들이 중장년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사장님’이라는 말을 썼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꼭 사장일까?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큰 부자로 대우받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개인 연락사무소로 이용했다. 종업원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라고 소리치면 다방 안에 있던 사람 반이 일어났다는 우스개가 전한다.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 이후 회사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사장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장년 남성을 ‘사장님’으로 부르는 관행은, 모르는 상대를 높여 주던 전래의 미풍양속과 회사가 속출하던 시대 상황이 결합해서 생겼을 터이다.

물론 사장보다 훨씬 많아진 사람은 ‘사원’이다. 오늘날 직업을 가진 한국인의 반 가까이는 ‘사원’이다. 회사원, 월급쟁이, 직장인은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유통업 노동자와 서비스업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인이지만, 그래도 모두 ‘회사원’이라는 통합된 이름으로 불린다. 회사원이 아닌 사람도 회사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먹는 것 일부를 제외하면,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다. 현대는 회사의 시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에 회사라는 이름의 기업 조직이 처음 출현한 해는 1883년이다. 이해 10월21일 한성순보에 ‘회사설’이라는 논설이 실렸고, 같은 무렵 평양 상인들이 대동상회, 서울 상인들이 장통회사를 설립했다. 이때의 회사는 ‘결사영상(結社營商)’, 즉 상인들의 동업조합 같은 것으로서 출자자를 사원, 경영자를 총무라고 했다. 사장은 대개 고위 관료가 겸했다. 오늘날의 사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원(雇員)이나 용인(傭人)이라고 불렀다. 자본주의의 모국인 유럽의 회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초창기의 회사들도 일종의 특권적 상업 조직이었다. 중앙정부가 발급한 회사 인허장은 잡세 면제증과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가 상업 자유의 원칙을 천명한 뒤에도 회사의 특권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나, 점차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처음 쓴 회사는 1898년 김익승이 설립한 부선주식회사였다. 재고, 자산, 나무 그루 등을 의미하는 영 단어 stock을 중국인들은 고본(股本), 일본인들은 주(株)로 번역했는데, 한국인들은 처음 깃(矜)이나 고본이라고 부르다가 이윽고 일본식 주(株)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정부의 중상주의적 정책에 발맞추어 여러 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사설 주식 거래소도 생겼다. 이때부터 주식회사의 시대가 열렸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시대 기업 유형 중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은 온 사회 구성원을 자본 아래 통합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주권(株券)은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고, 10만주를 가진 사람과 100주밖에 못 가진 사람을 같은 ‘이해관계인’으로 묶어준다. 갑 회사에 다니면서 을 회사의 주권을 산 사람은 자기 회사 실적보다 을 회사의 실적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주식회사는 자체로 압축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둘은 운영 원리가 같을 뿐 그 주체와 기본 이념은 전혀 다르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1표씩을 갖는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수결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반면 주식회사의 주권은 돈에 있으며, 모든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다수결의 주체는 전적으로 평등한 액면가의 주식들이다.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기본 이념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Capitalism을 자본주의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아마도 그 속성이 인본주의에 대립한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민주주의가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병립하는 상황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어떤 사람이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에 특혜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모든 사람이 분노한다. 하지만 재벌가 3세가 자기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주식회사에 특혜로 입사하여 초고속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적 기관에는 인본주의를, 사기업에는 자본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펼쳐진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립 법인들에서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원칙에 따를 것이냐를 두고 늘 문제가 발생한다. 종교재단에서 원로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은 온당한가? 사학재단이 이사장 자녀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은 온당한가? 언론사가 가족기업처럼 운영되는 것은 온당한가? 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원리는 사립 법인 내부에서만 관철되는 게 아니다. 얼마짜리 학원에 보내느냐에 따라 학생 성적이 달라지고, 변호사가 대형 로펌 소속이냐 국선이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 인류평등이라는 인본주의의 대의는 말뿐이고, 일상생활 전반을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인본주의적 선심(善心)이란 본래 아래를 향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적 선심은 위를 향한다. 가난한 사람 무시하고 부자에게 선심을 베푸는 건 현대인의 생활 윤리다.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이른바 ‘흙수저’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관건은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에 있다. 인본주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넓은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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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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