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익선동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다. 한옥을 수리해 만든 카페, 식당, 와인바, 옷가게에는 연일 인파가 몰린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가회동, 삼청동은 벌써 관광명소가 됐다. 빛이 바래고 시간의 더께가 앉은 건축이 젊은이의 감정선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가 100년도 안된다. 건축업자 정세권이 1920~1930년대 건설한 근대 한옥 뉴타운이기 때문이다. 

북촌이 한옥단지로 개발된 사연은 두 해 전 출간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지음)에 상세하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정세권은 1919년 상경한 뒤 이듬해 ‘건양사’를 세우며 건축사업에 뛰어든다. 당시 서울은 급팽창하고 있었다. 지방 빈농의 유입이 빠르게 진행된 데다 일본인의 서울 이주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주택난을 불렀다. 청계천 남쪽에 집단 거주해온 일본인들은 본토 이주자들이 늘자 북촌을 넘겨다봤다. 당시 북촌은 일제 침략으로 어려워진 권세가들이 내놓은 집들이 많았다. 정세권은 일본의 북촌 진출을 염려했다. 궁궐과 종묘, 사직 등 조선의 혼이 서린 그곳을 지키고 싶었다. 땅을 지키려면 조선인이 살아야 한다. 방법은 북촌을 한옥단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정세권이 구상한 조선식 집은 왕족과 사대부가의 대규모 한옥과는 달랐다. 전통을 이으면서도 생활에 편리한 집이어야 했다. 그는 대규모 한옥을 사들여 여러 채로 쪼개 짓는 방법으로 분양했다. 소규모 주택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이 한몫했다. 정세권의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했다. 1920년대 서울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고, 정세권은 그중 20%를 담당했다. 그는 경성의 ‘건축왕’이었다. 북촌 한옥의 대부분은 정세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세권은 경성의 한옥단지 개발로 10년도 안돼 부동산 재벌이 됐다. 그렇다고 돈 버는 데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대로 쓸 줄을 알았다. 그가 조선식 주택을 택한 것은 ‘한옥에서는 조선사람만이 살 수 있다’는 철학 때문이었다. 그의 근대식 한옥 건설은 항일의 또 다른 수단이었다. 정세권은 더 나아가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정세권은 경성지회 설립을 주도했다. 출판사를 세우고 ‘물산장려회보’ ‘실생활’ 등의 잡지를 발간하며 조선 상품 애용을 독려했다. 좌우 독립운동 연합체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해 재정 담당을 맡아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활동에서 정세권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사전 편찬, 맞춤법 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펼친 이 학회의 최대 후원자였다. 정세권은 사전 편찬, 잡지 간행 비용은 물론 학회 운영비까지 지원했다. 일제의 우리말 탄압이 본격화된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부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들이 대거 투옥됐을 때, 정세권도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경제사범으로 몰려 뚝섬 일대의 토지 3만여평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드러나지 않은 핵심 회원이었다. 해방이 되어서도 정세권은 ‘십일회’를 만들어 조선어학회 후원을 이어갔다. 1947년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나오고 10년 만에 모두 6권의 <큰사전>이 발간됐다. 한글학자 최현배는 ‘큰사전의 완성 보고서’에 정세권의 이름을 적시하며 감사를 표했다. 

건축왕 정세권은 유통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1930년대 ‘경성 3대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정세권의 길은 친일단체에 참가하고 전투기를 헌납했던 박흥식·최창학과는 사뭇 달랐다. 해방 후 정세권이 <큰사전> 발간을 지원하고 있을 때 박흥식과 최창학은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유야무야되면서 그들은 내내 호의호식했다. 두 사람은 뒷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며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반면 일제의 토지 강탈로 사업이 쪼그라든 정세권은 1950년대 말 낙향해 생활하다 1966년 생을 마쳤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기획특별전 ‘한글의 큰 스승’을 열고 정세권을 재조명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정세권을 주시경, 윤동주, 방정환, 헐버트와 함께 ‘한글로 나라를 지킨 인물’로 평가했다. 진열장에는 정세권의 활약을 보여주는 사진, 책, 잡지, 문건들과 함께 손때 묻은 유품 <큰사전>과 쌀되가 놓였다. 한때 서울을 주름잡던 ‘건축왕’이 남긴 물건은 이것이 전부였다. 전시장에는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박두성, 타자기 발명으로 한글 정보화에 앞장선 안과의사 공병우, 한글 글꼴의 원형을 만든 디자이너 최정호 등 한글로 새로운 시대를 펼친 사람들도 함께 소개됐다. 한글을 지키며 발전시키는 일이 국어학자나 작가들만의 몫일 수는 없다.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오늘은 573주년 한글날, 우리 모두 한글을 빛낼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운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