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혐오와 차별로 얼룩졌습니다. 자유롭게 이용하되 흔적으로 남아 증폭된 면이 없지 않으나, 모두 소셜미디어(SNS) 탓은 아닙니다. 점잖고 예의 바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져서도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팍팍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만도 아니고, 극우성향의 언론과 품위 없는 일부 정치인들 탓만도 아닙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맞고 복합적이기는 합니다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말과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문제’로 인식되고 있어서입니다. 문제라고 인지하는 ‘개인들’과 의제로 제기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해서입니다. 특정 집단 정체성에 기초한 ‘저항의 정치학’이 가능해서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유사한 일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가 활화산처럼 분출할 때, 대한민국은 ‘노동자’, ‘민중’, ‘민족’ 등 새롭게 구성된 집단 정체성으로 독재체제와 제국주의에 저항했습니다. 구성되었다 함은 착취와 핍박, 저항과 투쟁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를 인지하고 스스로를 노동자, 민중, 민족과 동일시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에서 ‘정체성’을 의미하는 명사 identity가 ‘동일시하다’, ‘확인하다’라는 동사 identify에서 유래한 이유입니다.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거나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본래의 성질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 왔으며, 식민지와 냉전체제의 유산들을 하나하나 청산하는 작업들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여성’, ‘성소수자’, ‘이주자’, ‘난민’, ‘장애인’ 등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의 정치가 격렬히 부상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반세기 전 반차별, 반제국주의, 반인종주의, 반이성애중심주의, 반남성중심주의에 기반한 운동이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것에 비하면 다소 지체된 감이 없지 않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특성과 경제·문화적 상황에 따른 것이므로 선발/후발이라는 탈맥락적 비교는 부당합니다. 

물론 여성들은 1980년대부터 부차적 문제나 부분 운동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으로 독자적 운동조직을 만들고 법과 정책을 만들기 위해 싸우며, 성평등 문화를 확산시켜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당수의 여성 활동가들이 민중의식을 선취하고 자본주의의 구조에 저항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최근 여성들은 일상에서 성차별의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정체성의 정치가 격발되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 될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변화해야 한다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어떤 조건에 놓여 있었는지 되짚어보기보다는 구조적 변화를 요청하는 이들을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로 여기거나 또 다른 독설로 응대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해결해도 될 사소한 일로 대의를 그르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나-개인을 공격한다고만 여겨 다시 타인을 무딘 칼날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간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들이 편견이요, 일면 누렸던 특권들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타인에게 위해를 입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은 뿌리 뽑히지 않은 과거의 문제에 또 다른 문제를 착목시켜 갈등의 원인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지켜 온 신념과 가치가 유일한 진리라는 생각도 문제입니다. 나를 형성하는 정체성이 단 하나요,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억압과 차별의 지표라고 여기는 생각도 문제입니다.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차이가 하나가 아니듯, 차별을 야기하는 차이 또한 하나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용되는 젠더, 인종, 계층, 섹슈얼리티, 장애 이외에도 학벌(학연)과 지역(지연)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유독 크게 작동하는 특수한 차별 범주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차별받느냐, 어떤 집단이 더 혐오의 대상이 되느냐는 상당히 맥락적입니다.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고, 사회적 위치와 상황에 따라 판단하되 결과의 파장과 심오함이 다를 수 있다는 신중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어떤 일로 가슴 아픈 사이, 누군가는 잉여인간이 되고 벼랑 끝에 서 있으며, 목숨이 박탈당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한 집단이 사라진다고 내가 현재 경험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바로 그 집단의 부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경자년(庚子年)이 시작됩니다.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새롭게 구성할 2020년대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랑과 연대, 평화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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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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